한 노인을 기억한다. 임원 교육 마지막 날이었다. 강의실은 술자리로 변했고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신참인 나는 하품을 참으며 문틈을 엿보다가 상무, 전무를 단 노인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나왔을 때 허리를 굽했다. 눈매가 날카롭고 배가 나온 할아버지들은 스물몇살짜리를 무심히 지나쳤다. 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찬 밤공기로 졸음을 쫓으며 맥주가 튄 가라오케 기계를 닦고 안주로 엉망이 된 테이블을 치웠다. 어느 임원이 두고 갔는지 이니셜이 새겨진 값진 만년필도 보였고 땅콩 껍질이 붙은 실크 넥타이도 책상 위에서 번들거렸다. 의자 등받이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연수생 이름목걸이를 치울 때였다.
“자네.”
돌아보니 한 노인이 앉으라고 손짓한다. 그는 벌써 의자에 앉아 있고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 셋이 간격을 두고 서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출입문은 소리도 없이 닫혔구나.
권력자. 힘은 표지가 없다. 노인은 홀 안에서 정장을 입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몸을 조이지 않는 흰 티셔츠, 아이보리색 면바지, 수입품으로 보이는 연두색 로퍼. 제왕은 수치가 없다고 했던가. 그는 은발조차 청결하고 반짝였다. 나는 할부가 남은 남색 정장을 입은 채 위축되었다. 남색은 안심시키는 색상, 성실한 복무를 약속하는 색이니까. 저는 정상입니다 그리고 성실하답니다. 내가 앉지도 않고 대답도 못하자 정적이 돌았지만 노인은 그러라지,하는 여유로 바라보기만 한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뒷정리가 곧 끝납니다. 회장실에 연락해드릴까요?”
“아니. 앉게. 젊은이랑 얘길 하러 왔어.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지만.”
얘기는 진행되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칠십? 팔십? 잔주름이 물결치는 그의 홀쭉한 뺨을 보며 나는 인내와 접대를 시작했다. 다행히 잠은 달아났다.
“하고 싶은 말씀 하셔도......"
“궁금한 것이 있나?”
“돈이, 아주 많으시겠지요?”
“……”
“어떤 기분이신가요? 부자로 사는 건.”
그는 웃었다. 술술 이어갔고 나도 끄덕끄덕, 추임새가 붙었다.
“강남은 툭하면 한강물이 새는 곳이었어. 야바위꾼들이 수를 냈지. 공유수면매립법. 강변을 메워 건물을 짓자는 거야.”
“누가요?”
“누구든. 메워주겠다면 매립 면허를 주겠단 말이었어. A회장이랑 몇이 나서서 물에 모래를 엎었지. 매립지는 물론 택지로 둔갑했고 그 아파트를 지었네. 처음부터 그런 그림이었으니까, 한남동 요정에서."
“누구 아파트를,"
“누구에게든 팔 수 있는 아파트, 누구도 갖고 싶어하는 것. 압구정 B아파트였어. 아무나 다 가지라던 여의도도 건물 올려 황금낳는 거위가 됐지. 그런 시대였어. 지루하진 않은 표정이군.”
“네.”
“이권 사업은 더럽게 진행되지. 다들 더 가지려고 하니까. 매립지를 너무 크게 만들기도 했어. 시에서, 그러니까 서울시에서 나와 몇개 지구는 퍼내서 다시 한강으로 만들라는 등 아수라였다.”
노인의 말투는 독백과 고백투를 오갔다.
“해서 나는 부자로 살아왔어. 강물을 땅으로 바꾸는 신기루에 벌집처럼 빽빽한 돈벌이를 올렸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건물로 층수를 높이면 돈은 곱셈으로 벌려. 땅은 그렇게 채권이 되는 거야. 재건축까지 이어져."
“네.”
“다른 궁금한 것이 있나?”
“왜 젊은 사람과 얘기하고 싶으셨는지요?”
“그냥.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거든. 붙잡아 두는 거지. 자넨 월급쟁이니까.”
“......”
“나이가 꽤 들어서야 돈이 내 위에 있다고 알았지.”
“네?”
“돈은 마름을 찾아다녀. 큰 돈은 살아있어. 일을 만들고 사람을 얽매. 속편한 부자는 없지. 돈은 운용을 해야 하거든. 바쁘고 고단하기만? 뺏으려는 사람도 많으니까 음험해지고……. 곳간 주인은 돈이야.”
“주인이요? 자손들은 주인이 되려나요, 처음부터 가졌으니까요."
“아들애는 나보다 힘들 거야. 상속자는 자기가 가짜일 지 모른다는 생각과 싸워야 하거든. 해서 재산을 더 불리는 것이 자존이 돼. 그게 인격이 되어버려. 호사를 누리고 싶으면 졸부가 최고지. 쉽게 벌어야 쉽게 쓰지."
“…….”
“이렇게 될 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땐 할 수 있는 걸 알면서 지나칠 수가 없었지. 길에 떨어진 지갑같아서 내가 줍고 싶었어. 안 가졌으면 후회했을 거야, 맞아."
"길에 떨어진 지갑이요."
"그렇게 세월이 다 갔어. 날 기다리는 건 과거 뿐이지."
노인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입을 열었다.
“후회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후회도 용기라네.”
"친구들과 얘기하시면 재미있으실 것 같은데요. 다른 시대였고,"
"얘기할 사람이 없어. 그래서 젊은이를 찾는 거야. 들어달라면서 말야."
"......"
"아프거나 치매거나 입닫고 물러나 있지. 죽을 때가 되면 문 없는 집에 사는 심정이 된다니까. 돈 번 얘기, 예전 내력 떠들어봤자 어두워지지. 계단이 무서워지는 처지에는 올라갔던 과거가 의미 없지."
"올라가셨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게 내 문제라네."
"......"
"불알 친구가 오래 갔었어. 아까운 것 없이 가난해도 아끼는 것은 있었으니까. 같은 얘길 하고 또 해도 좋은 추억이 있었지."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자네는 뭘 아껴?"
"......"
"아니면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
"꿈이요?"
"꿈이네 사랑이네 한가롭고 애매한 소리 말고. 내 말은, 자네가 정성을 들이는 것이 있냐는 거야."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있지. 팁이 있네. 지금 가진 것 그대로 가지면서 더 가지려고 하는 건 모험도 도전도 아니야. 더 안락하고 싶다는, 불안이겠지. 애쓰는 걸 만들어봐. 힘들어도 떠올리면 내가 따뜻해지는 그런 것 말야. 좋아해서 내가 좋은 것."
그의 고개가 내려간다.
“한우물이네 자기발견이네 남녀차이네 그런 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 하는 일에 자신을 거시게. 그러면 자기를 만드는 습관이 붙을 거야. 그건 돈으로 셀 수 있는 게 아냐.”
“어르신처럼요?”
“아부하는군. 난 평생 불안에 떨었고 앞으로도 용기가 없어. 지갑 주웠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