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바꾸어 적습니다
"이렇게 뵙네요."
H가 다가와 웃는다. 연수원에서 봤던 강사다. 미국 유학 갔다고 들었는데 유럽 구제 옷가게에서 마주칠 줄 몰랐다. 그녀는 엊그제 봤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한 말투로 차를 마시자고 한다. 단골 가게라면서 바로 옆 까페, 나무 장식이 아름다운 장소로 안내한다. 내가 만지작거리던 블라우스는 어느새 그녀가 사 준다. 까페로 들어간 H는 자신을 알아보는 직원에게 손짓을 섞어 뭔가 얘기한다. 내 앞에 따뜻한 물이 놓인다. 아무리 더워도 찬물을 마시지 않는 취향을 기억해주는 H. 다른 사람을 앞서 배려하는 어른 H.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녀가 맞다. 나는 들뜬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마지막 본 지가 십년 아니 더 되었을까요?"
내 물음에 H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먼저 안부를 들려달라고 했다. 말하는 동안 그녀는 배고프다면서 빵을 몇조각 주문하고 먹으면서 얘길 들었다. 바라보며 저게 재능이지 싶었다. 자기가 편한 대로 행동하면서도 앞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입을 우물거리면서 추임새를 넣는데 무례하거나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다. 친밀한 분위기. H는 대가 센 여자였지만 그녀가 피워내는 자장은 강하고 따뜻했다. 주변을 쳐내지 않고 품었다. 사람들이 좋아했다. H가 하소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 얘길 잘 들어주면서 '정말요, 그랬어요, 세상에'와 같은 추임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정밀하고 튼튼한 더듬이가 나와 있는 여성. 이제 오십대인 H는 얼굴에 고운 주름이 패여 깊이있고 우아해보였다. H의 차례가 되었다.
"놀라실 거예요."
"H 강사님, 비밀 결혼이라도 하셨어요?"
"전 가짜였어요."
거짓이었다. 부모, 고향, 대학은 물론 집도. 비닐하우스에서 자랐고 강사를 하면서는 거짓 이력을 믿는 연인의 집에 얹혀 살았다고 한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랐고 앞에 있는 그녀가 두려워서 일어나고 싶었다. H는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암사자같은 공평단단한 모습을 피우는 건 그녀가 분명하다.
"한국에 돌아가 고발하거나 절 비난해도 좋아요. 편한대로 하세요, 보복 같은 것 없어요."
창밖에 펼쳐진 오래된 길거리를 보며 웃는 모습이 늙고 슬퍼보여서 나는 용기를 냈다.
"왜 거짓말을, 어떻게 그렇게 됐죠?"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사기쳤어요. 다른 사람한테 좋게 보여서 사랑, 아니죠. 귀하게 대접받고 싶었어요. 귀하게 사는 것보다는 귀해보이는 것이 쉬우니까요. 좋아보이게."
"좋아보이게,"
"기회를 만들었어요. 경찰서에서 청소 일을 하다가 실종되는 여대생이 많다는 걸 듣게 됐어요."
작정을 하자 계획은 자동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H는 부모형제와 동거인이 없는 대상을 찾았고 인척이 실종신고를 하러 왔을 때를 노려 화장실에서 신분증을 훔쳤다. 애쓴 지 일년쯤 되었을 때 숙주를 만났다고 한다. 미국에 사는 노인, 큰아버지가 한국에 와서 조카딸 실종신고를 했다. H는 훔친 신분증 사진에 있는 스타일로 머리와 차림새를 바꾸었고 먼 지방에 있는 파출소에 가서 자진신고를 하는 것으로 새ID를 얻었다. 연락을 받은 큰아버지가 귀국했지만 갈등을 가장하며 피해 다녔다고 한다.
"지문이 걸리지 않았나요?"
"실종자와 범죄자 데이터 베이스를 따로 관리했었죠. 그때만 해도 방범장치나 CCTV가 많지 않아서, 내가 직접 지문을 바꿨어요. 삭제하고 등록해 넣었어요. 내가 새벽에 접속한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을 거예요. 감옥가는 꿈을 요즘도 꿔요. 뭐, 꿈은 그것만 꾸지 않죠. 그 여대생이 죽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원혼이 목을 조르는 꿈도 꿔요. 저 때문에 아무도 자기 시신을 찾지 않는다고......"
"......."
"하지만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교포 변호사라는 사람이 연락했을 땐 하늘이 날 돕는다고 착각했죠."
"원하는 걸 얻으셨나요?"
"네. 원하던 것도 얻었고 다른 것도 얻었죠."
"원래 지내던 곳 부모님이나 형제들과는 어떻게,"
"짐작하시죠? 거기와 단절하고 싶었던 거예요. 사람이 왜 자살하는 지 알아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예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으니까, 미래가 이제까지와 같을 테니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H의 독백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돈으로 가족 위에 군림하셨어요. 천원 아니 오백원도 필요하면 주저앉아 빌어야만 주셨죠. 모멸하는 걸 즐기는 인간이었어요. 엄마는 저랑 동생 때문에 이혼 못한다고 하소연 하셨지만 우리를 낳으면서 이혼하지 않을 구실을 만드신 거죠. 사회를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의존적인 여성이죠. 저는 매일 울며 자랐어요. 먹먹하고 답답해서 눈물만 나왔어요. 이제는 알지요. 아이였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어른들이 두려웠던 거예요. 부모가 돈이나 관심 말고 뭘로 자식에게 책임을 표현하겠어요."
"가족과 연락하신 적 있나요?"
"가끔 가 봤어요, 옛날 살던 집이요. 근처 건물 위로 올라가 관찰했죠. 가족들은 여전했어요. 멀리서 보면 작게 보였고 무가치해 보였죠, 꼬물거리는 작고 더러운 세상. 동생이 혼자 걷는 걸 보면서는 괴로웠지만 부모님 보면 다시 저 소굴로 가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다 이사를 간 것 같았고, 그 뒤로는 모르겠네요. 저를 실종신고한 줄 알았는데 여기 올 때 보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지금은 원래 이름으로 살고 계시는군요."
"네. 엄마가 집착이 큰 사람이어서 쫓겨다닐 각오를 했었는데 부모님이 다 아시는 것 같아요."
"뭘요."
"제가 떠나고 싶었다는 것, 떠났다는 거요."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담담함이 날 숨막히게 했다. 하지만 일어나기 전에 하나는 알고 싶었다.
"왜 다시 예전 이름이 되셨어요?"
"세상이 속아주어서요."
"네?"
"신, 그것은 인간의 외로움이다. 사르트르가 한 말이예요. 그 여대생은 철학과 학생이었어요. 자취방에 책이 많더라구요."
"......"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주는 신. 말하지 않아도 내 사정과 마음 다 그대로 아는 신이 있다면 기운이 날 것 같아요. 내 삶의 목격자, 증언자, 증명해주는 타인. 일기를 쓰는 것 같겠지요? 기록을 해야, 내가 알아줘야 마음 편히 잊어버리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신이 있었어요. 들킬까봐 조심하고 살다보니 내가 나를 밖에서 관찰하고 살면서 이중성이 골수에 배겼죠. 내가 나의 신이었어요."
"본인이요."
"그건 신앙 이상이었어요. 자면서도 깨어있는 인생이니까요. 두려움 위에서는 푹 잘 수가 없죠. 그래서 놓게 되었어요. 날 믿어주는 세상이 무거워서."
H가 날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 눈은 아까와 다르다. 슬픔이 없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증언만 떠오른다. 진짜는 실체가 있어 구분되고 알아볼 수 있다. 내 숨도 편해졌다.
"예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여권을 만들었어요. 혹시나 싶어 예전 신분증 내밀었는데 일사천리였죠. 지문이 이중으로 등록된 것이 스스로 찔려서 날인하는 미국 말고 여기로 왔어요. 미국 유학간다고 한 것도 페이크였죠. 난 절대 미국 못 가니까요."
"들킬까봐 걱정되시지는 않으세요?"
"경찰에 가서 내가 신분증 도용했다고 했어요. 그게 시작이어야 했죠. 같이 일한 사람들한테는 이메일을 보냈어요. 연수원 분들 다 아세요."
"네?"
"여기서 사귄 친구들한테 털어놓았는데 다 그러는 거예요, 누구나 거짓말한다고. 자책을 위로해주었어요."
"자책."
"한국에서 나한테 속은 사람, 몇번 위기 때 이상한 것 알면서도 넘겨준 사람들, 그런 사람들하고 마찬가지예요. 나는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은 '우리도 그래' 하면서 날 용서해준단 말이죠."
"......"
"나한테 화가 나요. 용서할 수 없겠죠. 편해지지 않을 거예요, 나는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