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하지 말아요

자격은 충분하니까

by 김인

"현금은 있어?"

K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기운이 없어 보여서 그 모습조차 희미하게 느껴진다.

K는 한때 좋은 친구였다. 입길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이 되고서는 변했고 그래서 멀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몇분 전 전화받은 지금은 당장 가까워졌다. 을씨년스런 늦가을 공원에서 난 K만 보인다.

인간의 양심은 정직하다.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쪽으로 마음을 쓰게 된다.

우리는 부모가 가난하면 떠나지 못하고 친구가 병들면 못본 척하기 힘들며

한때 재수없었을 지언정 몰락한 지인을 마주할 때는 얼마라도 챙겨 나오게 된다.


"그래도 받아."

K는 거절한다. 지금 도주 중이기 때문에 돈을 받으면 나까지 범죄를 도운 공범이 된다고 설명한다.

도주,라는 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지만 이 돈을 도로 가져갈 자신이 없다.

K가 초라했기 때문이다. 낡은 등산복을 입어서도, 쥐색과 남색의 우중충하고 흔한 조합 때문도 아니다.

K가 풍겨내는 옅고 낮은 한숨 때문이었다.

앉은 채 굳어버린 듯한 다리, 굽은 허리, 종잇장처럼 안으로 말려 흔들리는 어깨. 바람에 쓸리는 허깨비.


"그럼 이렇게?"

바닥에 돈을 던지자 그는 웃는다. 기다리자 나풀거리는 지폐를 주워든다. 그의 곁에 가까이 앉아 속삭였다.

"우연히 마주쳤네. 여기 웬일이야?"

그가 조금 더 크게 웃는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주절거렸고 그도 내 말에 응수를 하다 얘기를 조금 한다.

천만다행이다. 그는 자기합리화나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잘못해서 여러사람 힘들어졌다고 부끄러워한다.

가장 괴로운 사태는 내가 편들어 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일텐데

K는 명예는 잃었을 지언정 내적인 규율은 지키고 있었다. 난 용기를 내어봤다.


"자수하자."

"......"

"같이 가. 변호사 올 때까지 기다릴께. 국선변호사도 있고."

"내가 오만했어."


그의 입이 풀렸다. 서서히 밝아오는 불을 보는 심정이 된다.

촛불이 등불이 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진실은 느껴진다.

K는 모조리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크고 아름답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끄덕이며 옆자리를 지키는 사이 속내로 한발한발 내려간다. 우리가 중년이라는 환경이 다행스러웠다.

세월은 지하로 내려가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지 또 행운인 지 알려주었으니까.

우리 주변도 조용해졌다. 그의 음성이 자박자박 깔린다.


"아래에 뭐가 있었을까 생각해 봤어. 남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것. 세뇌. 인격지배.

생존이 해결되면 사람들은 꼭 힘을 피워. 남한테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바라고 강요해.

음습하게도 그런 걸 사랑이라 포장하기도 하고, 남 시키는 그걸로 자기 효능감을 얻기도 하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상대방이 무시할 때처럼 수치스럽고 화가 날 때가 없잖아?"


"안타까운 결론인데?"


"내가 그랬어. 다른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인정 중독이었어.

처음 정치를 할 땐 민중을 생각했는데...... 어느새 힘을 추종하게 됐지. 영향력, 남을 주어로 세우게 된 거야.

우리 학교에서 다 배웠잖아? 민중은 평범하고 아무나여도 각각과 나라의 주권자야.

그런데 난 민중한테 화를 냈고 나한테 실망했어. 남 앞에 서는 직업이 고약한 지점이지.

호응을 받는 쪽으로 타협해가다 지쳤고 결국 내가 갤러리를 쥐고 흔들고 싶어졌어.

그때 바로 알았어야 했는데. 갤러리 취급하는 내가 잘못한 건데."


"......"


"존중심을 잃었어. 남을 무시하는 건 나부터 무시하는 건데도."


"어느새 그렇게 된 건가?"


"의원님 소리 듣고 히터 나오는 차 타고 시중들어주는 사람, 아니 내 앞에서 수그러드는 사람 하나만 생겨도

야수성이 드러나. 우쭐대고 싶어서 정치를 집어든 게 아니었는데. 내 인생을 잘 쓰고 싶어서 정치를 했는데."


"......"


"지금 내 눈에 지나다니는 저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는 지 알아? 표정만 봐도 알아보겠는 거야.

저 사람은 자기 살고 싶은대로 살고 있구나. 아니 저 사람은 자길 싫어하는 것 같네, 그렇게......"


"놀라워."


"날 채근했어. 잘나지라고 좋아보이라고......내가 없애버린 자유 때문에 외롭고 힘들어.

나도 민중이고 그럴 필요 없었는데. 민중이라는 자체가 자격인데.

헌법에 적힌 그대로 누구든 같은 사람, 같은 가치. 범죄 아니면 어떤 직업도 같은 가치.

사회가 아직 덜 발견한 탓에 값어치는 다르게 매겨져도 사실은 같은 가치를 갖고 대접해야 한다는 것,

원칙을 기억해야 했는데. 하고 싶은 정치가 있었는데 내가 내려놓은 거야."


"표 받으려고 그러기도 했었겠지."


"한방울한방울, 두 손으로 받들었어야 했어. 민중으로 살았어야 했어.

인기가 없는 것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인기를 쫓아가는 것이 수치스러운 건데."


다음날 아침 그가 자수했다는 뉴스를 봤다. 달력을 볼 때 그가 출소할 날을 헤아리곤 한다.

만나서 그동안 산 얘기를 하기로 했다.

그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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