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저 정신차리라고 혼 좀 내주세요."
명지는 울상이었다. 우리는 밤에 캔맥주 한캔을 두고 벤치에 앉아 있다.
명지는 내 제자다. 봉사하는 친구 대신 잠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낮에 난리가 있었다. 한참 연상인 자원봉사 남선생이 애들에게 집적대다 쫓겨났다.
명지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닦고는 내게 보여준다. 그가 보냈던, 사랑 운운하는 문자들.
명지가 고민하는 사이에 다른 여제자와의 일이 문제가 되어 끝났다.
"사랑받고 싶지?"
내 대꾸에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명지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 아이가 부모를 얼마나 그리워했었을 지, 없느니만 못한 부모가 찾아와 스스로 친권상실을 신청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 지 나는 짐작도 못한다.
"사랑받으려면 사랑스러워져야 하는데?"
"......"
"사랑받으려고 사랑스러워지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사랑받고 싶어요."
나는 하늘을 보고 말했다. 차마 명지 눈을 보고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좋은 부모 만나도 어린시절 아주 잠깐 생존을 도움받다 자립해야 해.
그보다 사실은, 사랑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어.
사랑은 어렵고 드물어. 대개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고 싶어하니까.
받고 싶다는 소망을 태어나면서부터 질게 품고 살잖아. 따뜻하고 포근하고 든든한 것.
신이 있다면 사랑하겠다는 본능을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인간을 왜 약하게 만드셨을까."
"......"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10%는 진심일 거라면서 별걸 다 집어삼켰었지."
"허기가 져요. 진짜 굶은 것처럼. 딱 한번은 사랑받고 싶어요. 한번이라도......"
맥주 세 캔을 마신 아이는 함께 걷고 싶어했다.
강변 끝까지 왔을 때 이제 나보다 키가 커진 명지는 검은 밤을 테두리로 서서 말한다.
"선생님처럼 나이들면 나아질까요?"
"그럼. 경험이 힘이 되지."
"국어 선생님, 그런 사람인 것 알았어요.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것 뿐이예요."
"지배였겠지? 어린 너희가 구스르기 쉬워 보여서 이런 위악을......
그 선생님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겠지만 받아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야.
자기만으로 안되어서 마음대로 해줄 노예가 필요한 사람. 마취제가 필요한 사람.
친분 앞세워 정신을 지배하려는 사람. 흔하지만 그만큼 잔인한 일이 없는 것 같아.
내 얘기야. 내 욕심을 조심하려고 해."
"선생님은 왜 연락하라고 안 하셨어요?"
"응?"
"저희 끝날 때 연락 계속하자고 왜 안 하셨냐구요."
대답을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날아가서... 거기서 바빴으면 좋겠어. 오늘도 그 일 아니었으면 안 만났을 거고,"
"선생님."
"네가 사랑받고 싶다고 하거나 사랑스러워지려고 하기보다
네가 널 사랑하는 일에 오늘 몇 시간을 쓸 수 있었을 지 몰라. 난 네 시간이 아까워."
"......"
"널 사랑해줬음 좋겠어. 누구랑도 헤어질 수 있지만 자기와는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해.
네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제한이 없어. 남이 해주는 것하고는 비교도 안돼.
그러다보면 어느새, 혼자가 아니게 돼.“
명지는 말없이 돌아갔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집에 도자기 찻잔을 담은 택배가 왔다.
잘 써주실 분께 선물하겠다고 감사 문자를 보냈다. 아직 선물을 전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풀지 않은 채 계속 가지고 있고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사랑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잠시의 공명, 찰나의 상호명시, 시절 받아들이는 인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아무리 작고 잠깐이었어도 언제까지나 찬란히 반짝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