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등 몇가지 바꾸어 적습니다
1
“다른 데 가자.”
엄마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셨다. 동네 '행운 수-퍼' 안에서 주리 엄마가 수퍼 아저씨를 향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생일맞아 초콜렛 사러 나온 참인데 엄마는 내 눈을 피하며 손을 꼭 감아쥐고는 큰 길 건너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수퍼를 향했다. 큰 사각형 그림자가 새로 칠한 횡단보도 하얀 빗금 위로 떨어져 있다. 산동네 사는 우리들은 여름이 지나면 부쩍 솟아가는 그 거대한 아파트 건물들을 거인 웨하스라고 불렀다. 깜빡깜빡하는 빨간 신호등을 보며 내 작은 머리에 어제 아침 일도 기억이 났다.
“아저씨! 내가 팬티 입었다고 그러시는 거죠?”
옆방 주리 엄마의 장난스런 목소리였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돌아보고는 우리 아버지를 향해 눈웃음을 던진다. 아빠는 시선을 하늘로 하고 담배를 태우고 있다. 주리 아주머니가 남성용 사각팬티를 입은 차림이어서다. 아빠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큰 소리로 대꾸했다.
“허허. 그건 속옷이 아니구 핫팬츠요!”
“역시 우리 싸장님이라니까!”
깔깔대는 웃음. 그때도 경쾌했다. 공중에 물뿌리개를 올리는 것처럼 가볍고 금세 사라졌다.
“주리네는 불여시야.”
건너편 셋방에 새로 이사 온 영민이 엄마는 단언하셨다.
“그만해요. 애 들어.”
“알건 알아야죠? 다방여자였다잖아요. 커가는 기집애들이나 꼬여내면?”
“아이고 영민 엄마. 열살을 뭘 꼬여내…….”
주리 엄마는 쌍꺼풀진 눈이 정말 크고 예뻤다. 다섯 살배기 딸 주리도 예뻤다. 제 엄마에게 혼나고 마당으로 쫓겨나면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에 감아 뱅뱅 돌리곤 했다. 이웃 아줌마들이 건네주는 미숫가루물을
부글부글 거품소리나도록 불어 마시던 뺨이 앳되었다.
주리 아빠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나중에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그제야 알았다. 트렌치코트. 그분 몸에서 처음 봤는데 큰 키에 썩 어울렸다. 우리 동네 애들은 그 옷을 영국 마이라고 불렀고 주리 아빠를 영국신사라고 했다.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2
“결국 내가 만만하니까. 그러니까 나 데리고 사는 거 아냐? 응?”
“주리 자. 깨겠어.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편해?”
주리네 부부싸움. 자기 전에 수박을 과식해서 일찍 깬 나는 마당 건너편에 있는, 그러니까 바닥에 응아가 훤히 보이는 재래식 화장실 가다가 말뚝이 되었다. 걷자니 소리가 날 것 같고 참자니 마렵고, 아니 엿듣고 싶고. 달동네 소녀는 소변을 참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던져놔도 못 떠날 여자니까. 그런 여자 필요한 거잖아? 그런 직장 달고 나같은 술집 여자랑 왜 살아?”
“우린 오래 살았어.”
“…….”
“나랑 사는 거 답답하겠지만 나는 당신이랑 사는 게 좋아.”
“뭐어? 이 XX아.”
하지만 조용해졌다. 다음에 이어질 소리나 소동을 기다렸지만 소변 참느라 내 몸만 꼬여왔다. 살금살금 다시 방광을 비우러 발을 옮겼다. 우리 엄마는 주리 아빠를 좋아했다. 세도 한번도 안 밀렸고 점잖다고 했다. 걸핏하면 동네 시끄럽게 하던 우리집 큰소리도 모른 척 해주셨고-주리네 부부싸움은 살림 부수는 우리 부모님에 비하면 말장난 수준이다- 어린 내게도 조심스럽게 목례하셨다. 몇분 후 가벼워진 방광과 열린 귀를 달고 주리네 방 앞에서 염탐을 작정한 내게 부스럭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춘기 초입의 내게도 성애가 전해왔다. 가슴이 몽글몽글하고 뭉클하다가 따뜻해졌다. 날 둘러싼 새벽의 시린 안개조차 촉촉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주리 아빠 목소리가 커진다.
“이야, 나 주려고 아침밥을 다?”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던 주리 엄마가 남들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났다. 흰밥 위에 계란 후라이도 얹어 상에 탁, 소리를 내며 올렸다. 더운 여름이면 산동네 사람들은 큰마당에서 식사를 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부끄러움을 숨긴 주리 엄마의 얼굴은 더위 때문인 지 석유 곤로 때문인 지 붉었고, 주리 아빠의 싱글벙글한 얼굴과 계란 후라이의 고소하고 따끈한 내음에 마당에 나와 식사하던 다들 모서리가 부드러워졌다.
3
“이 후진 데서 내 새끼를 깔 수가 있어?”
바람 드나드는 윗골목에서 기와를 빻아 소꿉놀이 준비를 하는데, 영민이네 소리가 꽂힌다. 영민 엄마가 둘째도 낳고 고향에 집을 사두자는 남편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중간중간 자기 몸을 때리듯 부채질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아파트를 사야지! 딱지(입주권)만 모아도 응?”
“난 아파트 싫어. 그리고 돈이 안될 수도 있잖아. 결국 우린 못 들어가 살아.”
아저씨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웃기고 있네. 운수놀음 같지? 다 진짜 돈이 몰리는 거야. 이 화상아! 차는 누가 타고 아파트는 누가 살겠어? 다 같은 사람이 사는 거야. 몇번만 그렇게 돌리면!”
이번엔 아버지가 내 귀를 막듯 들어올려 안는다. 손을 꼭 잡고 밀듯 데리고 나가신다. 담배 사러 가는 김에 하드 사주신다면서, 하나 사면 두개 먹는 쌍쌍바를 고르라고 한다.
얼마 후 달동네는 시끌시끌하다. 영민 엄마가 곗돈을 빼돌려 딱지를 사들이고는 수퍼 아저씨랑 야반도주를 했다. 양가 부모님들이 야반도주한 배우자를 둔 사위와 며느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으시며 하얀 털이 드문드문 빛나는 주름진 턱을 힘없이 주억주억 끄덕이셨다. 하여간 더워서 모든 일이 다 큰마당에서 이뤄지는 바람에 윗집 아랫집 뒷집으로 나눠져 놀게 하던 애들도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와서 눈물을 떨구었다. 윤기가 도는 은발을 한 노인들 사이에서 낡은 메리야스를 입고 울던 영민이는 바로 그 다음 월요일에 전학 갔다. 할머니가 사줬다면서 파란 칼라가 달린 빳빳한 흰 셔츠를 입고 와선 굳은 얼굴로 배꼽 인사를 하는데 반 애들 다 아쉬워했다. 시간은 흘러갔다. 주리 엄마는 짧은 남성용 팬티를 입고 다니며 여름을 났고 우리 엄마아빠도 여전히 싸우시며 하루가 한달로 뒤잇기를 했다.
4
이제는 그때 큰마당에서 한숨쉬던 분들처럼 은발이 된 영민이 어머님이 우리집을 수소문해서 찾아오셨다.
“그게요, 그땐 좋았겠죠.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몇년 지나니까 애도 낳고 가계부 쓰면서 집 늘리구 근데, 그런데 아파트 딱 입주하니까 싸움도 줄고 잠자리도 안 하구 그냥 시시해지더라구.”
해서 수퍼 아저씨랑은 애저녁에 갈라섰단다. 한채 한채 집 늘리며 부자는 되었는데 말할 친구가 없어 외롭다는 소리셨다.
“주리 엄마는 어떻게 계세요?”
얘기를 듣던 나는, 그 까만 밤에 떠돌던 온기가 기억나서 과일을 내미는 틈에 여쭤 보았다.
“거긴 주리 아빠가 오년 전엔가, 일찍 갔다던데? 췌장암인가 뭔가. 근데 주리 엄마가 그 왜, 주리 아빠 코트 있잖니. 그걸 여즉껏 입고 다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