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큰딸은 매번 주말마다 집에 온다. 이전에 학생 때나 취준생이었을 때는 기대도 않던 일이다.
'오늘은 몇 시쯤 올 거니?'
보통은 '퇴근하고 바로 버스 탈 거야'라고 답이 온다. 하지만 가끔은 늦은 밤에 오기도 하기에 잠이 쏟아지는데도 터미널까지 데리러 간다.
그런 딸이 어느 날 불쑥 차 안에서 물었다.
"엄마, 난 언제 철이 들었던 걸까? 고민한 기억이 없어, 사춘기란 게 있긴 했나?"
그 말 끝에 나는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20년을 거슬러 갔다. 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후 담임선생님과 첫 면담 때였다. 집에서는 선머슴처럼 뛰어놀고 동생들을 휘어잡느라 바쁘던 애가 학교에서는 말이 없는 편이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늘 소란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사춘기라도 된 듯 집과 학교에서의 생활이 다르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남편과 난 서로 자기주장을 하느라 밥상머리가 시끌했다. 종일 일을 한 남편은 몸이 피곤하니 짜증이 났을 것이고 농사일만 해서 살림 꾸리기가 힘들었던 난 직장을 찾아 나설 작정으로 연신 집을 비우곤 할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딸아이는 진지하게 말을 내뱉었다.
" 나는 나중에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시골에서 사는 것도 싫고, 나중에 크면 암튼 멀리 갈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리 없는 눈물만 흘렸다. 대학도 못 가고 취직이 잘 안되자 부모님 앞에서 내뱉던 스무 살의 나 같아서 더 그랬다.
생각 같아선 머리 쥐어박으며 '가시나야,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래야 시골을 벗어나 좋은 곳으로 가든지 할 거 아니가?' 하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며칠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아이에게 엄마인 내가 달라 보여서 저 생각에서 빠져나올까 하고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었나? 여고시절 내내 주인집에서 들리던 '소녀의 기도'를 손가락 지법도 모른 채 가끔 뚱땅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다 긁어야 매장에 걸린 옷 한 벌 값도 안 되었다. 그런데 그 돈으로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피아노를 배운다는 생각만 해도 소리를 듣는 것만도 내게도 치유가 될 것 같았다. 물론 목표는 '소녀의 기도'를 제대로 치는 것으로 정했다.
농사인 참외 작업이 끝나는 오후 시간을 택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오가는 내내 뜨거웠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 등록을 하고 보니 돈이 바닥이 났다.
피아노 학원비를 벌겠다고 작은 잡지에다 글을 써 보냈더니 원고료가 들어왔다. 그러구러 3개월째가 되었다.
"엄마, 친구들이 그러는데 네 엄마 피아노 학원 다니데? 하며 부러워하더라. 그런데 엄마,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골에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농사일을 하지만 그래도 피아노도 치고 글을 써서 돈도 받잖아? 이젠 그런 이상한 고민 같은 거 안 할 거야, 그냥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할래."
그때도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서 울었다.
아이답지 않다는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으로 심각하던 때가 불과 몇 달 전이었건만 다행히 딸아이의 학교생활은 달라져갔다.
공부는 물론 운동과 노래 등 다방면에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다른 아이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였다.
큰딸은 사춘기가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그때 이후로는 어떤 일 앞에서도 차분하게 대처하고 넘어갔다. 다행히 코로나 시대임에도 취직 시험에 합격했다.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살겠다더니 지금은 '결혼 안 해!' 라며 외려 큰소리치고 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곡이라도 제대로 쳐보리라 마음먹었던 '소녀의 기도'마저 가끔 귀로 들을 뿐이다. 단지 엄마였기에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선택했던 그 용기가 추억이 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