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요, 내가 병들기 전까지만 해도 집 밖을 나서면 ' ㅇㅇ 여사님'하고 부르며 날 좋아한 양반들이 줄을 섰었지, 아프고 나니 힘이 없어 어디 가질 못해 심심하고 답답한데 예까지 오니 더 갑갑해서 살아 있다는 게 무슨 소용 있냐 싶구먼 그냥 이대로 죽는 게 낫지"
그럴 때마다 나름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건네봐야 허공에 메아리 같았다.
그러다가도 노래강사가 오는 날은 꽃단장을 하시고 어깨춤까지 추시면서 열심히 노래를 배우셨다. 그래서 봄만 잘 이겨내면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여 같이 산책도 다니고 개울 나들이에 재미를 붙이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는 급 우울해하셨다. 어쩌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줄어든다 싶어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평소 식성은 좋으셨는데 어느 날부턴가 돌아가신 영감님이 보고 싶다느니 꿈에 뵌다느니 하실 때쯤에 아무리 용을 써도 화장실볼일을 못 보겠다고 해서 비닐장갑을 끼고 손으로 직접 관장을 해 준 일이 있었다.
그 모든 게 수치스럽다고 고맙단 인사 끝에 말씀하셔서 그럴 수도 있다고 열심히 드시고 걸으시면 된다 했다. 하지만 점점 식사량이 줄어들어갔다.
어느 날인가 "이리 고생하며 노력해 봐야 좋은 시절이 다시 오겠느냐,?' 하시며 기도지향을 바꾸셨다고 하셨다. '자식들 더 고생시키지 않고 고만 영감 보러 가게 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그때 얼결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다며 그 말에 동조 한 걸 후회 할 일이 이내 생기고 말았다.
애초에 수술이 어려운 부위에 암이 자리 잡았기에 항암효과는 커녕 고생만 하고 돈 잃는 일만 생길 수 있다는 말에 자연치유를 선택한 것이라 했었다.
그런데 반년이 가까워도 달마다 돈만 들어가지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아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 아들네 집으로 다니러 가셨다가 약속된 날에 다시 오시지 않았다.
그 무렵 나도 집으로 와서 며칠 머물렀다.
하루하루 봄날은 따스하다 못해 짙어가는데 마음은 갈핀 하니 불안한 가운데 친정에서 연락이 왔다.
돈 들이지 않고 암치유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요양할 곳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신청받는 날에 여러 사람이 전화를 돌려야 할 것이란 정보까지 물어다 주었다.
같은 방 할머니께서 집으로 가신지 몇 주도 안되어 아드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셔서 잘 모셨노라고 울먹이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시기 전에 장례 치르고 나면 꼭 한방 쓰던 새댁한테 고맙단 인사를 대신해 달라고 하셨단다. 암환자는 아무리 못 먹고 고통스럽더라도 의식은 말짱하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았다.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신부님께로부터 마지막 기도까지 다 받으셨다고 했지만 나는 왠지 마치 내가 한 한마디 때문에 그리 쉽게 가셨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먼저 가서 기도 할 테니 더 있다 와'
농담 같던 그 말이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분을 시작으로 한 지붕아래 마치 한가족처럼 지내던 몇 분이 서둘러 퇴소하거나 하늘나라로 떠나는 이별을 경험한 뒤에 연거푸 떨어지던 무료 교육장에 드디어 당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