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가 내 몸에서 자라게 된 원인을 꼽자면 많다. 마음 관리를 못해서, 사랑이 부족해서? , 비우기가 안되어서!, 불규칙적인 생활 등등,
나 스스로의 나쁜 습관에 이어 늘 조바심쳐야 하는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 되어있는 것과 정서적인 지지부족에다 가족들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반응들도 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늘 추운 집의 환경까지 말이다.
9월초에 도착한 집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난히 추위에 민감한 나는 겨울을 어떻게 맞을까가 겁이 났다. 평소에 열이 많은 남편은 농사일할 때는 물론 잡다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 항상 덥다고 했다. 하여 한겨울에도 초저녁에 나무보일러에 장작 한통 넣고 자면 등이 차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일 년 중 그래도 지낼만한 때는 땀은 좀 흘려도 여름한철이 가장 살만했다. 그 여름을 지나 다시 집에 오니 여전히 추위에 대한 걱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뿐이 아니었다. 먹는 것도몇 달간 요양차 다닌 곳들과는 차이가 많았다. 다만 마당만 나서면 온통 들판이고 멀리 가까이 산이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몸이 차니 설사가 여전해서인지 거의 종일 피곤과 기운 없음에다 밥도 잘못 먹었다. 영락없는 환자 형색이 완연하니 수술 대신 선택한 투병의 길을 혼자서 우기기는 참 위태로웠다. 이러다 급격하게 나빠지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잠은 눈만 감으면 잤다.
요양하면서 배운 데로 실천하겠다고 계획표를 짰다. 밥 먹는 시간을 중심으로 기도와 산책 시간을 넣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놀기를 아주 조금 넣었다. 그냥 볕을 쬐든 풀을 뽑든 할 요량이었다. 사실 번번 계획표는 잘 만든다. 그다음 실천력이 늘 문제였다.
부식을 사다 나르는 사람도 없고 기운도 달리니 늘 밥상이 부실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고삐가 풀릴만한 때가 될 무렵 일주일간 단기 쉼터에 당첨되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비록 기도응답처럼 받은 성서말씀대로 집으로 오긴 했으나 힘들면 언제든 한 달에 한번 단기쉼터 이용을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다가올 겨울이 무섭다는 말을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남기고 짐을 쌌다.
보름 남짓 지난 시점에 다시 들어간 쉼터는 반가웠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때와는 달리 일단 돌아갈 곳이 있었다. 단 쉼터 비용은 내게 있는 비상금으로 지불했다.
공적인 활동 이외에 아침저녁으로 성당에 가서 기도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산책도 환우들과 같이 쉼터 옆 동산을 걷거나 가까운 들판을 다녔다.
여전히 저체온에 가까워서인지 손발뿐 아니라 배가 차서 설사는 달고 있었다. 덕분에 건강보조식품의 가짓수가 늘었다. 그래도 기체조를 한 다음이거나 기도를 나름 찐하게 한 때는 화장실 가는 횟수가 줄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에 집에 남아있던 아이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시해 온 가족이 집 앞 마당가에다 황토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는다고 말이다
눈물이 났다. 가슴이 뭉클해서 실컷 울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요양비 이외에는 모른다며 큰소리치던 남편이 남은 돈으로 집 지을 결정을 하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쉼터가 끝나갈 무렵 성당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중에 환청처럼 느껴진 말이 3등이었다. 곧 아이들의 시험기간이었다. 혹시라도 받을 기회를 놓칠까 봐 얼른 감사기도를 올린 뒤에 아이들에게 연락했다. 이번 시험 잘 준비해라 그럼 결과가 좋을 것이다. 그 환청 같이 들려온 소리는 거짓말처럼 이내 이루어졌다.
내게 와서 자리 잡은 이상세포는 나를 포함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알리려는 걸까?
두려움 가운데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은 바로 내 마음속 구석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느낌과 감정들, 그리고 관계에서의 자유로움이었다는 것은 길고 긴 방황의 끄트머리에서나 만나게 되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때는 언제일지 먼 내일의 일이고 우선은 눈앞의 변화에 신경이 곤두선채 겨울을 맞을 채비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