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종교로 가진 남편은 시부모님과 동서네와 아이들을 데리고 기족 절 투어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나갔다. 그사이 나도 짬짬이 합류해 어느새 100회를 넘기고 또 다른 100회를 채워가고 있다.
남편과 결혼 말이 오갈 때 친정 쪽에서는 맏며느리 자리이니 만치 살림을 내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시댁과 다른 종교만은 허락해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처럼 종교문제가 시부모님 말씀 속에 종종 양념처럼 섞여 나오곤 했다. 그래도 나는 번번이 약속은 약속이니 하고 모른 척했다.
시집오면 시댁 풍습을 따라야지 하던 동네 사람들의 품앗이 말 듣기도 지쳐 갈 무렵이었다. 남편의 몸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온몸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가려워서 긁고 나면 진물이 나서 다음날이면 더 번지곤 했다. 가족과 아내 사이에서 조율이 잘 안 되니 그 울화가 바깥으로 나오나 싶었다. 양약 한약 처방에다 쓰디쓴 곰보배추를 삶아서 바르고 먹고 해도 좋아지긴커녕 외려 간만 더 나빠졌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차도가 없자 그동안 귀가 얇으신 어머님께서 애초 다니신다던 절 대신에 점을 보고 굿도 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용하다며 불러다 시작한 굿판에서 점쟁이 말인즉 큰며느리가 성당에 다녀서 그렇다고 곧장 시어른께 아뢰었다.
신앙을 버리면 만사가 형통하다나 어쩐다나? 하여튼 평소 말도 잘못하던 내가 그날 밤은 용기 내어 선언한 말로 결혼하고서 가장 큰 난리가 났다.
‘아무리 그리하셔도 모태신앙이기도 한 하느님을 버리진 않겠다, 정 못마땅하시면 차라리 가정을 버리겠으니 어른들께서 정해주십사’ 한 것이었다. 그때가 큰딸이 갓 초등 입학할 무렵이었다. 밑으로 두려움에 떨며 눈망울만 굴리는 아이들이 둘이나 더 있는데도 호기롭게 큰소리치며 신앙을 지켰다.
이후 수많은 갈등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과 가정을 지키고자 내 능력 이상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나름 노력했다. 평소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고집부리기에 미운털은 배가 되고 남편의 질긴 피부병은 나을 듯 말 듯 십 년이 넘어갔다. 가족들과 어머님 성품에 감히 들어온 며느리가 반기를 제대로 든 탓에 남편은 속이 한껏 다 뒤집어져서 피부로 뱉어내나 싶었다. 남편은 내게 남은 약간의 마음마저 거두어들인 듯 점점 더 냉랭해져 갔다.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종종 따라다녀도 내겐 하루하루가 생지옥 같았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마음이 먼저 포기하려고 해서 더 힘들었다. 그런 중에도 고맙고도 기특한 것은 결혼 전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셋이 된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서 적응하며 스스로 살아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가까스로 종교의 자유를 얻어낸 것은 순전히 암 덕분이었다. 그때는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한 것은 상처뿐인 내 마음의 위로였지 신앙심이라고는 어디 남아있으랴 싶었다. 미움과 원망으로 똘똘 뭉친 냉혈한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적어도 내게는 인간적인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몸에 대한 처방보다 마음치유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