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재들의 소녀
선우휘의 동네는 최고의 찰흙이 나오는 뒷산이 있다.
이 동네는 뒷산자락에 파묻히고 앞산의 거대함에 푸욱 파묻힌 외지이지만
찰흙 덕분에 외지인이 가끔 드나든다.
뒷산의 찰흙은 이 고장의 명물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찰흙을 조물거리듯 무엇을 만들거나
으깨는 재미는 한결같은가 보다.
토요일 오후에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니, 과부인 엄마가 무너진 부뚜막을 고친다고
찰흙을 퍼오라고 시켰다. 부뚜막 고치는 일은 겨울준비 중 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부뚜막 고치는 것은 관심에 없고 산에 가는 재미에 신바람이 일었다.
마침 발차기에 관심이 있던 선우휘는 동생들과 신나게 뒷산으로 향했다.
양동이를 들고 찰흙 동산과는 거리가 떨어진 산으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밤이면 안방을 차지하던 엄마의 외조카가 미웠던 선우휘와 동생들.
특히 그중에 맏이였던 선우휘는 엄마의 외조카 송채의 침략을 막아내고 싶었다.
송채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으로 맨 정신으로 초등학생인 선우휘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학교에서 제일 높은 학년이고, 집에서도 제일 맏이지만 송채라는 거대한 남자의 방문을 막을 힘이 없었다.
날마다 이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진 약함에 스스로 비굴해졌다.
매일 밤마다 송채가 집으로 갈 때까지 잠들지도 못하고 경계할 때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이소룡에게 꽂혔다. 이소룡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이 장면을 본 후 선우휘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꿈속에서.
나무와 나무를 날아다니는 상상만으로도 송채의 안방 야간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비 없는 집안의 야간침입자의 횡포를 날아다니는 상상으로 견딜 수 있었다.
선우휘에게 살짝 찾아온 사춘기.
막무가내로 밤이면 찾아오는 송채라는 인간.
선우휘는 날마다 자나 깨나 주문을 외웠다.
"송채가 우리 집에 안 나타나게 해 주세요, 얍!
송채가 우리 집에 다시는 못 오게 다리를 부러 뜨러 주세요, 아비용!
송채가 우리 집의 이불에 더러운 발을 넣지 않게 해 주세요, 빠비용!
송채가 우리 마을을 떠나게 해 주세요. 얍!"

선우휘는 낮밤으로 야간 침입자를 몰아낼 궁리를 했다.
이런 마음으로 선우휘의 발길은 소나무가 무성한 산으로 향했다.
"나만 따라와! 이제부터 나가 송채를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할 거니까!"
동생들은 양동이를 들고 뒤를 따랐다.
드디어 비스듬한 산의 중턱에 도착했다. 선우휘는 기어오르기에 가장 만만한 소나무를 발견했다.
그 소나무에서 저 소나무로 날아서 이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기하게도 첫 비행에 성공했다. 날렵하게 소나무에서 소나무로 이동했다.
동생들은 폴짝폴짝 뛰면서 박수를 쳤다.
그 응원에 신바람이 난 선우휘는 다시 그 소나무에서 다른 소나무로 힘껏 날개를 폈다.
하지만 선우휘의 몸은 아래로 향했다.
동생들의 "우~~ 화"라는 감탄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파고들었다.
동생들의 간절한 바람과 응원이 심장의 박동에 열정을 더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선우휘는 그대로 꼬구라졌다. 다리가 꺾였다. 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다시 일어섰다.
통증만 심해졌을 뿐 다시 일어서기는 글렀다.
선우휘는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억울함, 부끄러움, 실패 등의 감정이 동시에 곤두박질쳤다.
너무도 큰 울움소리는 이산에서 저산으로 메아리쳤다.
세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을로 먼저 내려갔다.
영웅의 좌절에 두 동생도 합세하여 힘껏 울었다.
선우휘는 눈물을 벅벅 닦으며 정신을 차렸다.
"뚝! 그만 울어, 느그 둘이는 마을로 내려가서 아재 집으고 얼른 가.
아재한테 나의 다리가 부러졌다고 말해.
아퍼, 아퍼, 아재를 데리고 와."
동생들은 비장한 맏이의 말을 듣고 아래로 향했다.
발목이 퉁퉁 부어오른 형제를 혼자 두고 엉엉 울면서 산길을 내려갔다.
남매는 세상이 두 동강 나듯 비참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소나무에 부딪치며,
바위에 발이 걸리며 아래로 아래로 걸어내려 갔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마침 아재가 마당에서 농기구를 챙기고 있었다.
"아재, 누나가 지금 산에서 다리가 부러졌어요.
퉁퉁부어서 울고있당게요."
동생들은 아재 앞에서 엉엉 울었다. 아재라야 8촌, 겨우 친척으로 이어져있었다.
그래도 그 어린아이들의 생각에도 형제를 구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재의 옷자락을 흔들고 당기며 울었다.
아재는 그 어린아이들의 눈물에 가슴의 둑이 무너져 내린 듯 참담하고 애틋해졌다.
"방금 마당에 들린 바람소리가 느그들의 울음소리였구먼!
걱정마라, 내가 내 조카 병원에 데리고 갈랑게."
아재는 부랴부랴 오토바이와 돈이 있는 문씨 집으로 향했다.
아재는 이 정황만으로 선우휘가 심각하게 다쳤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급해졌다.
혼자 산에서 퉁퉁 부은 다리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 아이가
자신의 아이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오토바이와 돈을 가진 문씨가 떠올랐다.
인간의 두뇌는 마음이 급한 만큼 빠르게 연결 카테고리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계산 머리보다 마음 쓰이는 정보가 훨씬 정확하고 빠르다.
아재는 이 문제를 해결할 문씨를 바로 떠올렸다. 오히려 직접적인 자신의 일보다 먼 친척인 선우휘를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쉬웠다. 당당하고 떳떳했다.
"문씨, 지금 아짐집 큰 아그가 많이 다쳤네.
오토바이 좀 빌려주소.
그라고 현금도 필요한디. 2만원 정도 빌려주소."
문씨도 마음이 급해졌다. 문씨는 헛간에 모셔둔 오토바이를 꺼내고, 그의 아내와 그의 어머니는
각자 숨겨둔 비상금을 꺼내러 각자의 뛰어들어갔다.
자기들이 가진 모든 현금을 털고 끄집어 내서 전해주었다.
"얼렁 데리러 가시오. 얼렁 가시오. 어린것이 산에서 얼마나 아프고 무서울까..."
문씨의 젊은 아내는 벌써 눈물을 훔쳤다.

선우휘는 소나무를 붙잡고 일어서보려고 몇 번 시도해 봤다.
그럴수록 다리는 점점 더 부어올랐다. 저녁햇살을 눈물로 반사시키는 사소함마저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산 쪽으로 가까워졌다.
선우휘는 큰소리로 울며, 자신이 있는 곳을 아재에게 알렸다.
아재는 어떻게든 산까지 오토바이로 오르고 싶었지만 오토바이는 말이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두리번두리번 찾았다.
"아재, 아재, 엉엉엉"
"움직이지 마라, 그대로 있어, 아재가 왔다."
아재는 단방에 선우휘를 들쳐 업었다.
오토바이는 지그제그로 산길을 내려와 신작로를 달렸다.
자갈이 툴툴거렸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우휘는 아재의 등에 딱 달라붙어서 계속 울었다.
아재의 등의 아이의 눈물과 땀으로 젖어오는 듯 축축해졌다.
그때 어렴풋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아기야, 왜 울어? 부러진 다리가 아파서 울면 계속 울고
돈이 걱정되어 울면 뚝! 해라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선우휘 깜짝 놀라 아재의 등에서 이마를 슬그머니 들었다.
"아재 부자다, 울지마라.
뼈붙이는 돈을 걱정마라."
아재의 말이 연이어 들려왔지만, 아재인지 아버지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두운 덕산고개를 넘어갈 때, 어둠 속에 불어오는 바람도 무섭지 않았다.
선우휘는 눈물을 뚝 그쳤다. 아재의 등에 딱 붙어있었다.

어느새 '뼈접골'이라고 크게 바위에 적힌 골목이 나왔다.
최관장이 운영하는 뼈접골 집이다.
태극마크가 크게 그려진 나무 대문이 한쪽만 열려있었다. 그 집이 뼈접골 병원인 셈이다.
아재는 오토바이를 골목에 세웠다. 선우휘를 조심스럽게 업었다.
최관장은 원래 체육관을 운영했던 분이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운영할 때부터 배운 오랜 경험으로
뼈를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뼈를 잇고, 뼈를 붙여서 다시 일어선다.
"최관장님, 조캅니더. 요절한 선우 씨 장녑니더"
아재는 한 마디라도 더 보태서 치료비를 깎아볼 요량이었다.
"에라. 딱 보니, 이 다리 부러졌다. 깁스해야 쓴다.
이리 부어오르니..."
최관장은 부랴부랴 제자를 시켜서 깁스할 준비를 시켰다. 석고 반죽하라.
"석고 반죽 일 인분 해 놓고 집가라."
발목 부분의 복숭아뼈가 부러진 것으로 진단하였다.
이리저리 다리를 만지며 아재와 최관장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 많이 울었다더니, 아플긴데 안 우네. 기특하다.
새까만 눈매가 지 아부지를 많이 닮았구나."
최관장은 선우휘의 표정을 살폈다. 뼈가 부러진 곳과 정도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이제 어디가 아픈지, 소리를 지르고 울어야 부러진 곳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아프면 소리를 질러라"
선우휘는 복숭아 뼈를 짚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다친 곳의 아픔보다 엄마의 피 같은 돈이 쓰이는 것이 더 아팠다.
마음이 크게 더 아파서 다리 통증이 무디게 느껴졌다.
최관장의 손등에 뜨거운 눈물이 또록또록 흘러내렸다.
최관장의 눈물인지, 아재의 땀인지, 선우휘의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움이다.

그 순간, 최관장은 이 아이의 아버지인 선우의 근엄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잊어버리고 살고 싶었던 그 사나이의 부자다움이 생각났다.
진짜 부자였던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치료비를 흥정하는 가난한 딸이 눈앞에서 울고 있다.
최관장이 마지막 일본인 후예로부터 체육관을 인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선우의 덕분이었다.
이미 일본의 기세는 떨어진 동아줄인 줄도 모르는 체육관 수장의 제자가 인수 비용을 요구했다.
나이가 많은 노장들은 그 제자를 살짝 처단하자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최관장의 의견은 달랐다. 일본 수장의 제자는 이 지역 백성들에게 관대했고 요구하는 비용도 소박했다.
일본으로 돌아갈 여비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 체육관을 드나들며 운동하던 선우는 즉석에서 그 비용을 해결해 주었다.
가난한 시절을 보냈던 그들에게 피가 튀길 수도 있는 금액을 아무런 조건 없이 해결한 진짜 부자 선우의
모습을 최관장은 잊지 않았다.
최관장은 선우에게 차용증이라도 써주고 마음의 돌을 가볍게 하고 싶었다.
선우의 손을 끌고 사무실에서 차용증을 써서 주었지만 선우는 그 차용증을 챙기지 않았다.
"이 차용증은 우리 체육관에서 보관하며 기억하겠네. 선우..."
선우휘의 아버지는 그 상황에 대해서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휘적휘적 나섰다.
최관장은 일본인 제자에게 '인수증'을 받고 체육관의 주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최관장이 선우에게 빚을 내서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장날이면 선우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조용히 돌아갔지만,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최관장은 마음이 불편했다. 고마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어떤 고마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마음은 비굴함으로 이어진다. 어떤 빚이 죄책감으로 남는다.

최관장은 선우휘의 발에서부터 정강이까지 깁스를 하며
그의 아버지를 계속 떠올렸다. 작고 가느다란 아이의 다리에 정성스럽게 석고를 입히며
자신의 마음의 빚을 덜어냈다.
"최관장님, 이 아이 뼛값을 얼마나 받을 건지..
요즘 이 집의 형편이...돈의 씨가 말라서..."
아재의 애타는 말이 들려왔다.
"돈 걱정하시 마시게. 나도 생각하고 있네."
최관장은 돈을 받기는 받았다.
그 누구에게도 부담스럽지 않고 아재에게도 마음의 빚으로 남지 않을 만큼 받았다.
비굴함으로 남지 않고, 딱 고마움으로 남을 금액을 받았다.
깁스가 끝나고, 그 위에 붕대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최관장은 선우휘의 두 발을 모아서 조심스럽게 안았다.
오토바이에 아재가 먼저 자리하자, 선우휘를 가장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앉혀주었다.
선우휘는 아재의 등에 옆얼굴을 묻었다. 덕산 고개는 어둡고 컴컴했다.
아재의 뒷모습은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아재의 목덜미 흰 셔츠 깃은 단정하고 빛났다.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단골 이발관은 다른 동네에 있었다. 이발하러 갈 때마다 선우휘를 말동무로 데리고 다녔었다.
이발하고 돌아오는 시간은 늘 밤이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선우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올 때, 가끔 어둠이 무섭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말을 시켰다. 이발하여 유난히 희고 깨끗해 보이는 아버지의 목덜미 흰 셔츠를 보면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어둠도 반짝이게 했던 아버지의 흰 셔츠.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날처럼,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그날처럼 아재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나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해댔다. 송채가 밤마다 자기 방을 침략한다고,
송채가 아랫목을 차지한다고, 송채가 텔레비 채널 셔틀을 시킨다고,
송채가 고구마를 구워오라고 시킨다고, 시원한 물을 떠오라고 시킨다고.
아재에게 전달되지 않고 바람결에 날아가더라도
무서워서 계속 말을 했다. 억울했던 마음의 아픈 말들을 아재의 등에 기대어 날려보냈다.
그 누구에도, 엄마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해댔다. 울면서, 다시 울면서.
오토바이는 달리고, 선우휘의 눈물은 날리고.

그렇게 주절대자, 집에 도착했다. 서당골의 이웃들이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 주인인 옥출 아저씨가 제일 먼저 뛰어나왔다.
마당에는 서당골의 모든 사람들이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짐, 뼛값은 걱정마시오.
최관장이 싸게 해줬소. 그돈은 내가 내기로 휘하고 약속했소."
그때 옥출 아저씨가 나섰다.
"아니오, 휘의 뼈값은 내가 낼게요. 어차피 휘가 우리 아기를 늘 업어줘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소.
돈 갚지 마시오."
아재는 선우휘를 방에까지 안아서 앉혀주었다.
뼈가 빨리 붙어라는 덕담과 기원을 남기고 돌아갔다.
마당에는 이미 쇠고기, 멸치, 떡, 쌀 그리고 촛불까지 쌓여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서둘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선우휘는 엄마한테 예상보다 적게 야단맞았다. 무겁고 뻐덩한 한쪽 다리를 거치할 자리를 마련하고
겨우겨우 잠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면도칼로 도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깁스한 다리에 산을 올려놓은 듯한 통증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치 산처럼 큰 울음소리로 울어야 사라질 통증의 강도로 아팠다.
선우휘는 산처럼 크게 울었다. 산까지 울리도록 크게 울었다.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는 과거 깁스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ㄴ자로 앉아서 산처럼 울었다. 엄마는 두 손을 비비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대신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때 밖에서 술고래 주정뱅이 아저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이, 선우, 선우... 문좀 열어보시오."
엄마는 새벽이라 약간 두려워하며 문을 빼꼼히 열었다.
"아그가 많이 아픈가...뼈가 뿌사졌으니 얼마나 아프것소.
이밤이 고비요.
이거 나가 아껴 마시는 소주...이거 라도 기부스의 틈으로 넣어보시요."
술고래 아저씨는 반 이상이 남은 대병 소주를 주고 얼른 마당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소주를 숟가락으로 떠서 깁스의 틈으로 계속 넣었다. 깁스의 틈이 너무도 미세하여 한참이 지나서야
차가운 소주가 복숭아뼈까지 전해졌다. 술주정뱅이 아저씨의 간절한 바람이 전해졌다.
그 간절한 바람에 산 같은 고통이 아버지의 무덤만 한 고통으로 줄어들었다.
아버지의 무덤만 한 고통을 느끼며 자고 일어나니 견딜만해졌다. 살만해졌다.

송채는 선우휘가 깁스한 날에도 사실은 담벼락까지 왔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너무도 많아서 방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아니 마당에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것이 인간의 본심이다.
송채는 스스로 그 집의 야간 방문은 착취이고 침입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밤이 되자 선우휘 집의 아랫목 루틴은 어김없이 자행되었다.
당고모 집이라는 명분을 세우고, 선우휘 집을 향해서 죄 많은 몸이 움직였다.
대나무가 무성한 비각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멱살을 잡는 사람이 나타났다.
송채는 멱살에 잡혀 어두운 비각으로 끌려들어 갔다.
멱살에 잡혀 정신이 없는 찰나에 주먹이 날아왔다. 주먹에 맞아 비명도 지를 틈도 없었다.
송채는 맥을 추지 못하고, 컴컴한 비각 마당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려고 발목에 힘을 주고 버둥거릴 때, 군홧발이 발목을 힘있게 지그시 밟았다.
송채의 발목 뼈가 지그시 뚜우욱 부러졌다.
지그시 밟히는 강도가 마치 송채가 지은 죄처럼 조였다. 지금 죄지으러 가는 쾌감처럼 끔찍했다.
비명을 질렀으나 오토바이 소리에 묻혔다.
"야 인마, 송채, 너 밤에 돌아다니면 죽인다."
오토바이 어둠은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말하는 자는 딱 어둠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채는 순간, 아무런 비명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왠지 구조를 요청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죄책감과 불편함이 가슴을 꽉 눌렀다.
송채는 발목의 뼈가 l자로 부러진 채로 자기 집까지 기어 왔다.
죄책감과 불편함은 그 어떤 반성보다 그를 크게 변화시킨다.
반성에는 반드시 죄책감만큼의 고통이 동반해야 진정성이 있다.
인간의 심판이 훨씬 관대하다. 신의 심판 전에 찾아온 인간의 경고는 껌이다.

선우휘는 다리 병신으로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선우휘가 깁스한 첫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불을 밝히고 마음을 밝혔다. 이날은 야간의 침입자 송채가 나타나지 않아서 아파도 포근했다.
선우휘와 동생들은 많이 울고, 많이 힘든 날이었지만 편안하고 따뜻한 밤을 보냈다.
그다음 날 밤이 되자 선우휘는 다리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송채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릎까지 석고깁스가 된 다리를 접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쭈욱 펴고 있던 다리의 허벅지부터 수건을 덮었다.
석고깁스한 다리를 동생들이 부산스럽지만 빠르게 들어서 앉혀주었다.
밤이 되면 등장할 송채 때문에 생긴 루틴이었다.
동생들은 선우휘가 송채와 거리를 두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아랫목을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자신들은 윗목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송채는 가장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자정이 될 때까지 텔레비전 주인행세를 했다.
아랫목에서 선우휘에게 발장난을 치려다 뜨개질을 배우던 대나무 바늘에 찔린 적이 있었다.
그 후 동생들에게 가끔 장난을 시도했지만 선우휘의 대나무 바늘을 무서워했다.
엄마는 송시열의 후예로, 그의 친정 조카뻘 되는 송채를 감히 섬기듯 했지만 선우휘는 어림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엄격한 유교의 우상 분위기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송채는 낮에도 밤에도 다시 출몰하지 않았다.
어떤 폭력은 그 폭력이 끝날을 때서야 깨닫기도 한다. 이 깨달음은 폭력을 행한 자와 당한 자에게 해당한다.
어떤 불편함은 익숙하여 당연하게 여기기도 한다. 다만 분노와 억울함으로 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