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대부분 사람은 먼저 가족과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이 가족이기에 당연할 것이고 학교나 사회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도 소중하다. 나는 가족 중에서 우선 둘째 형수님을 꼽는다.
어린 시절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안면도 섬 소년이었던 나에게 둘째 형수님의 등장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중요한 만남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육지에서 한학자셨던 조부께서 간척한 안면도 목밭이란 곳에 정착하시어 간척지를 관리하는 마름을 하시게 되었다. 뒷산에는 붉은 적송이 빽빽이 차 있고 간척지 너머에는 광천과 대천으로 다니는 장배가 있었다.
조부모와 부모 형제까지 함께 모여 사는 대가족 구성원에 어느 날 서울에 가 있던 둘째 형님이 군대에 가게 되어 집에 오게 되었는데 옆에 앳된 형수님과 함께였다. 아버지는 이웃에 사는 친구와 미리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날벼락처럼 둘째 형수가 나타났으니 집안에 한바탕 큰 소동이 났다. 그렇게 둘째 형님은 군대에 가고 형수님은 우리 가족이 되었다.
당시에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형수님이 좋기만 했다. 또 형수님도 막내인 나에게 많은 신경을 써 주셨다. 나는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집에 오면 뒷산에 가서 땔감도 매일 해왔다. 당연히 성적도 좋아졌고 집에서도 칭찬을 많이 받는 아이로 성장해 갔다. 그해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 예쁜 조카가 태어나서 우리 가족은 큰 조카와 함께 가족이 더 늘어났다.
어느덧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형수님은 농사일과 갯일로 바쁜 할머니와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하셨고 나는 항상 맛있는 반찬이 든 도시락과 잘 다려진 교복을 입고 다녀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부님이 돌아가시고 둘째 며느리를 예뻐하셨던 아버지도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군대에서 제대한 둘째 형님은 옆 마을로 제금 나서 살림을 차리시고 나는 둘째 형수님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면서 공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공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무꾼과 선녀처럼 형수님은 세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고 어느 날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된다. 서울 목동 사거리에서 ‘삼거리정’이라는 큰 갈빗집을 하시던 당숙을 돕다가 상가 건물이 생기면서 생선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형수님은 성격이 활달하시고 통이 크셔서인지 금세 단골들을 확보했고 생선 가게는 성황을 이루었다. 가진 것이 없이 시작한 가게 일이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부가 생선 가게에 매달리다 보니 어린 세 남매는 지하 셋방에서 생활하다 연탄가스를 마시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형님 부부는 가끔 들르는 막냇동생에게 맛있는 생선요리를 해주시기도 했고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셨다. 그사이 나는 교대를 졸업하고 경기도 시흥에 있는 장곡초등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되었다. 형님네도 김포공항 옆에서 작은 횟집을 운영하시다가 해물탕집을 시작하셨다. 형수님은 요리 솜씨가 뛰어난 데다 부지런하셔서 새벽마다 노량진 시장에 가서 싱싱한 해산물을 사서 무쇠솥에 해물탕을 파셨다. 주변에 음식 소문이 나서 매일같이 손님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고된 식당 일에 몸이 매우 아프기도 하셨다. 의지의 한국인이신 형수님은 그럴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셔서 식당을 운영하셨다. 심지어 내 결혼식 피로연 밑반찬도 직접 준비해 오셔서 하객들에게 대접하시는 정성을 쏟으셨다.
이렇게 고마우신 형님 부부는 김포 고촌에 민물장어 식당을 운영하시게 되었다. 김포 고촌에서 시내로 넘어가는 산이 천등산이라 식당 이름을 부르기 편하게 ‘천둥산민물장어’로 상호를 정하였다. 당시에 장어라는 음식은 비싸기에 대중적이지 않았지만 형님네 식당은 점점 소문이 나서 서울과 부천, 일산에서까지 찾아왔다. 이런 소문난 식당이 되는 비결은 일찍이 안면도에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께 배운 충청도 맛에 형수님의 손맛도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싱싱한 재료가 아니면 손님에게 제공하지 않는 형수님만의 음식 철학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갑자기 둘째 형님이 당뇨합병증이 와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손상된 폐에서 혈액이 멈추지 않는 위중한 상황을 겪었지만 다행히 회복되어 퇴원의 기쁨을 맛보았다.
‘천둥산민물장어’집은 그 후에 고촌 언덕에 있는 태리로 이전하여 운영되고 있고, 민물장어 정식은 형수님의 손맛에 직접 구운 장어를 거북 철판에 올려서 먹는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명절이면 우리 4형제 부부와 가족들이 둘째 형님댁에 모여 조상님께 차례 음식을 차리고 감사예배를 드린다. 결혼한 세 조카 부부와 손주들까지 모이면 왁자지껄한 권씨 집안 대가족 모임이 된다. 가끔 행주산성에 들러 권율 장군께 참배하며 권율 장군의 큰아버지 집안이라는 자부심을 후손들에게 심어주기도 한다. 내 아들들도 큰어머니의 음식 솜씨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과거의 삶이었지만 커가는 손주들의 재롱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돌째 형수님. 언제까지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