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체험을 마치고 버스에 승차했다. 고려시대 때 지어졌다는 백련사. 효령대군이 7년이나 이곳에 기거했다고 한다. 강진만 바다가 가까워서 왜구가 침입할까 봐 토성까지 쌓았다고 한다.
백련사를 둘러보고 다산초당을 향해 산길을 걸었다. 만덕산이었던 이 산에 차나무가 많아 정약용이 호를 다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강진 유배생활 8년 만에 아내의 외가 해남윤씨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는 다산초당. 학생들이 기숙하며 정약용의 학문을 전수받아 18명의 제자를 양성하였다.정약용과 백련사의 학승 혜장스님이 넘어 다니던 다산초당. 10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화가 통해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주역을 함께 논하고 특히 차를 함께 나누는 사이였다고 한다.
실학의 중조 성호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을 읽고
성호의 제자를 자처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정조의 총애를 받아 거중기를 발명하여 수원 화성까지 축조한 정약용은 천재였다. 조선이 정조가 장수하고 순조 이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부국양병을 했다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안산에서 교장으로 재직시절 안산의 뜻있는 분들과 평생학습관에서 성호 이익 선생에 대해 스터디를 하며 성호 이익 생가와 성호 호수 복원 등을 안산시에 지속적으로 건의했었다. 하지만 시장과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이었다. 강진의 공무원들이 힘을 모아 청렴교육을 대한민국의 모범으로 키운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스터디한 자료를 바탕으로 성호 이익 83세 일대기를 10권의 소설로 완성하려던 계획은 지금 멈춰있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숙원사업이 되었다.
미래는 관광산업을 발전시켜야 생존이 가능하다. 안산시도 상록수역에서 내려 최용신의 기념관을 관람하며 심훈의 상록수 소설을 모티브 한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보고, 성호 이익 선생 묘와 성호기념관을 견학 후 단원 김홍도 미술관 관람, 이어서 경기도미술관 관람 후 버스를 타고 대부도 방조제 조력발전소, 이후 대부도 포도체험을 하고 시화호 유람선을 타고 안산시로 돌아오는 관광코스 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