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의 세무담당 언니가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점심시간이라고 민원대를 통째로 비워둘 순 없으니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12시부터 2시까지 조를 짜 교대로 식사를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1시가 조금 지나서 그 민원인이 오셨던 것 같다. 민원인은 일부러 점심시간을 피해서 온 거라 하셨기에(여기서 1차 감동) 나는 세무담당 직원이 1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이라 양해를 구하며 어떤 일로 오셨는지 여쭤보았다.
그녀는 고지서 두 장을 건네주었다. 한 장은 자동차세 고지서였다. 사실 세금 납부 자체는 등초본 발급만큼 간단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민원인에게 카드와 고지서를 받아 세금 납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장의 고지서가 문제였다. 그 고지서에 뭐라고 적혀있었더라. 수도 어쩌구 점용료 어쩌구였던 것 같은데. 이게 지방세인지 세외수입인지 상하수도인지 헷갈렸던 나는 세무담당 언니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아 언니 식사 중에 죄송해요 민원인이 오셔서. 고지서에 뭐뭐라고 적혀있는데요. 아 이거 세외수입이고 전자납부번호 입력해서 똑같이 하면 되나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세금을 납부하던 중 앞에 앉아계신 민원인이 정말 순도 100%의 어조로 질문을 건넸다.
아무래도 자기 일이 아니면 하기 힘든가 봐요?
아, 그 순수하고도 당연한 질문이 나에게는 얼마나 힘이 됐던지. 그때 받은 감동을 아직도 기억한다. 공무원에게도 각자의 고유한 업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원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어떤 직원이 출장을 나간 동안 그 자리에 민원인이 왔다 치자. 주민센터에 오면 초특급 스피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민원인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옆자리 직원의 일이다. 만약 그 직원이 연가 혹은 반가를 썼을 경우 남아있는 직원들의 죄책감은 더욱 심해진다.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오늘 이 분이 휴가셔서요 어쩌구 아무 주민센터에서나 가능하시거든요 저쩌구...
어떤 아저씨는 자기 수도요금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따지다가 급수센터 번호를 안내해주면 주민센터가 이런 것도 모르냐고 성을 내고, 또 어떤 아저씨는 오늘 이 직원이 연가라 이러이러한 업무 처리가 힘들겠다고 사과를 하면 업무 대체자도 없냐며 한심해한다. 나는 이러한 민원인들이 전생에선 산업혁명에 반대하는 공방의 장인들이었을 거라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대 사회의 분업을 이리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으므로.
어디 관공서에 전화를 했는데 자꾸 전화를 돌려줘서 짜증났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디 이해해달라. 정말 모르니까 넘기는 거다. 공무원들 또한 괜히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가 꼬투리를 잡는 민원인에게 시달린 경험이 한 번쯤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원인이 있다면 공무원들의 뇌가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민원인도 존재한다. 내가 처음 발령받아 복지 업무를 보던 때의 일이다. 당시 사망신고가 접수된 어떤 할아버지가 국가유공자면서 기초생활수급자였는데, 나의 업무분장표에는 보훈이 있었기에 나는 국가유공자 사망위로금을 신청할 것을 안내하려 할아버지의 따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열심히 사망위로금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장제급여는 신청기한이 정해져있나요?"
기초생활수급자가 사망할 시 그 유족에게는 장제급여라는 것이 나간다. 간단히 말해 장례비용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내가 어버버대자 그녀는 짜증에 시동을 걸어대기 시작했다.
"주민센터에서 저한테 장제급여 신청하라고 전화했었거든요?"
나는 급하게 옆옆자리에 앉아있던 복지직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화는 돌리지 않은 채였다. 그 언니도 장제급여에 신청기한까지 있는지는 몰랐던 터라 열심히 지침을 찾아보았고, 슬슬 늦어지는 대답에 그녀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기요 주무관님. 주무관님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으면 대답 정도는 준비하셨어야죠."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건 건 이번이 처음이고 장제급여를 신청하라는 전화를 건 건 내가 아니었는데요? 그러나 나는 당황한 나머지 해명도 못한 채 연신 대답이 늦어져 죄송하다며 사과만 했고 그녀는 뭐라뭐라 더 톡 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적극적으로 전화를 돌리는 공무원이 되었다. 전화 돌려주면 절반은 간다는 게 나를 포함한 많은 공무원들의 철칙일 것이다. 앞서 말한 부류의 민원인들은 관공서의 공무원들을 어떤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어 A는 A'라는 일로 민원인에게 전화를 걸로 B는 B'라는 일로 민원인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어 '주민센터 다니고 시키는 거 다해요' 모드를 발동하면 쌀쌀맞은 민원인들은 공무원이 그것도 모르냐며 '주민센터 자퇴해'를 남발한다. 관공서에 가서 뭐 좀 물어봤더니 다른 직원한테 넘기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고? 당신에게 최소한의 공감능력이 있다면 그 공무원의 트라우마를 공감해주고, 당신이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상 공무원도 현대인이기에 분업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