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솔 Jul 22. 2022

3. 과장님은 내가 잘될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 하고

대표님은 옛 직장동료에게 연락을 해준다.



 내가 지금의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지는 3달도 채 되지 않았다. 맡은 직무도 문과생에게 진입 장벽이 낮은 성격의 것이라, 나는 미래를 길게 보고 나와 맞는 일을 찾은 뒤 나의 전문성을 쌓을 생각으로 기초부터 배우는 중이다.


 그러나 쉽게 불안해하고 조급해하는 본성은 어디 가지 않은 탓에 나는 나의 성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겠다는 대표님의 약속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연차가 쌓여도 막내 노릇만 주구장창 하면 어떡하지. 회사가 커져도 나는 팽 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내가 회사에 다니면서 전문직 시험이라도 붙으면 싸그리 없어질 고민이겠으나 나는 진득하게 공부를 하지 못하니 9급 공무원 시험이나 봐야겠다고 결심한 전적이 있다.


 그래서 아닌 아침중에 대표님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내가 대표님께 한 얘기의 핵심은 이러했다. 나는 정말 능력을 쌓고 싶은데 이 회사가 나에게 그런 역할을 맡겨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확신을 달라고. 아직 일한 지 N주밖에 안 되었는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가 공무원일 때 고분고분 굴다가 어떤 꼴을 당했던가. 나는 어떻게든 내가 '어려운 일도 열심히 배우고, 소화해낼 수 있는 인재'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었다. 만약 내 고민에 대표님이 전혀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이직을 할 생각까지도 있었다.


 나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대표님은 예정에 없던 면담에도 1시간 가까운 시간을 들여 내게 믿음을 주려 애쓰셨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는 나에게(죄송합니다, 대표님.) 이것은 혼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셨는지 종래에는 누군가를 떠올리셨다. 대표님이 이전에 4년여를 다녔던 직장의 동료로, 나와 업무 포지션이 비슷했던 분을.


  분은 시작점은 나와 비슷했으나 회사 규모가 커지고 직원수가 늘어나며 지금은 HR 팀장으로 입지를 굳히셨다고 한다. 내가 정말 소름이 끼쳤던 (?)  분의 학력과 회사에 입사한 나이마저 나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대표님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분이 생각나셨던  아닐까. 대표님은  분과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테니 커리어 발전 측면에서 궁금한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지만 감사한 것은 둘째치고, 대표님이 내가 본인과 함께 오래 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으로 있던 과의 과장님은 '너 따위가 뭔데 면직을 하냐'는 태도로 나를 깎아내리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어라, 세상의 모든 '장'들은 아랫사람을 이렇게 부리는 게 아니었다고?

 





 사실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었다. 조금 잠잠해지나 싶던 코로나가 다시 폭발적으로 확산세가 일어나던 탓에 그냥 집에서 '홀리데이'를 갖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는 나에게 과장님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처음부터 한 말은 이러했다. "네가 공무원 일을 하기엔 아깝다고 생각해?"


 단둘이 갖던 식사자리에서 나는 1시간 가까이 과장님의 폭언을 들었다. 사람의 뇌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나. 1시간 동안 '나는 공무원이 아니면 인생이 망할 애'라는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니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는 그 칼들을 온전히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과장님은 나에게 네 계획은 잘될 가능성이 하나도 없고, 네가 허송세월을 할까봐 내가 이러는 것이며, 부모님한테 죄송하지도 않냐고, 공무원을 그만두면 네 미래가 보이지 않고, 계속 공무원을 하면 작은 아파트를 사서 애 둘을 낳고 살 텐데 왜 그러냐고, 9급 공무원 시험 경쟁자만 50만 명인데(대체 어디서 나온 수치일까?) 현실을 좀 보라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독재자가 되지 말라고, 등등의 말들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당시에 직렬을 바꿔 공무원 시험을 다시 칠 생각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로 법원직을 얘기했더니 과장님이 이러시더라. '내 친구가 법원직인데 40대, 50대 되니까 어린 애들한테 명령받는 게 쪽팔려서 그만뒀대. 게다가 심지어 여자였대.'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한테 지시를 받는 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는 것을 젊은 여자인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람은, IMF 이전에 대학까지 졸업했음에도 9급 공무원 기술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본인 입으로 직접 본인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 본인이 제일 잘살고 있단다. 그게 본인의 혜안 덕분인 마냥.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과장은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어 면직 의사를 접을 것이라 진심으로 믿고있었다는 점이다.





 이러니까 내가 대표님에게 고마우면서도 무언가 사기를 당하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던 것이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직원을 중요한 인력 대우해주는 곳이 존재한다고? 나는 '워킹홀리데이에 지원이 가능할 정도로 젊디 젊은' 사람에게 네 미래가 망할 것이라는 악담만 퍼붓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왔는데? (놀라지 마시라. 과장이 다가 아니다.) 똑같이 한 조직의 장인데 이토록 극과 극일 수가 있을까?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잘못됐다면, 그건 과장과 대표, 둘 중에서 누구일까?


  나는 생전 처음 받아본 '귀한 사람' 취급이 얼떨떨하면서도 내가 만약 나의 미래에 먹구름이 가득하길 바라는 그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면 40대 중반쯤엔 억울해서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상상만 해도 오싹해진다. 대체 왜 이런 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지? 아니, 사실 이런 세계는 늘 존재하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던 거지. '나는 특출나게 잘하는 일도 없고 회사에 들어가면 마흔도 전에 잘릴 것 같으니 공무원이나 하자'라는 생각을 하던 24살의 내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