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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하루살이 Nov 12. 2024

인연 맺기

수많은 인연, 그 중 하나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촌동생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되었다며 연락이 왔다.


난 간판 하나 없이 알음알음으로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을 1:1로만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 수학만 가르쳤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과외 교습을 받는 아이들의 학령이 낮아지게 되어 중학생부터 가르치게 되었고 중학생 수업은 과학을 같이 진행하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초등학생도 가르치게 되었는데 주변의 지인들의 아이들이 학원에서 너무 힘들어하고 학원 가기를  싫어한다며 내게 부탁을 하게 되면서 초등학생도 수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게 오게 되면 아이들의 표정은 좋아졌고 오지 않겠다고 하는 일은 없게 되어 고맙게 시간을 나누게 된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나던 날엔 햇살이 아주 좋은 봄날이었다. 보통은 첫인사를 오는 날엔 엄마와 학생  둘이서 방문을 하는데 이 아이의 부모님들은 아빠까지  오셔서 상담을 하셔서 더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아빠의 관심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 당시 따끈따끈한 중간고사 시험지를 보고 싶어 가져오라 했다. 시험지를 잠깐 훑어보는데 아빠께서 일일이 체크하시며 이렇게나 많은 문제집을 풀었는데 이 점수밖에 못 받았다고... 내가 듣기에도 민망하게 아이에 대해 털어놓으시는 것이었다. 몇 가지 알고 싶은 내용을 그 아이에게 물으면 옆에 앉아서 아빠가 먼저 답해주시곤 하셔서, 아이에게 직접 듣고 싶다고 내가 말을 잘라야 했을 정도였다.


그 아이의 학습에 대한 부담감이 이 잠깐의 순간에도 느껴졌다. 다니던 학원에서 성적 미달로 잘리고는 아빠께서 직접 공부를 챙기셨던 모양인데 그 높고 격앙된 표현이 결코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이 아이를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공부하지 않아서 속 썩이는 아이들도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한데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분명히 내가 도울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40~50점 정도의 시험지를 보고서 난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 과정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집에서 보던 문제집을 몽땅 가져와보라 했었는데 몇 권이나 되는 문제집을 다 풀은 흔적이 있었다. 그 분량도 상당한 것으로 봐서 노력이 부족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시작은 의욕적이었다. 어느 학생이 오더라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이 아이는 숙제를 잘해왔다. 숙제만 잘해와도 맘이 놓였다. 그런데 보통의 여자 아이처럼 깔깔대거나 큰소리로 또는 수줍게라도 웃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상대를 경계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아이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농담도 해보고 작은 칭찬이라도 자주 해주고 될 수 있으면 가벼운 목소리 톤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가끔 던지는 농담에 웃는 모습도 보여줬고, 방과 후에 하는 그룹활동에서 보컬을 한다고 했는데 그 활동에 관심도 보여주고, 나 나름 최대한 그 아이의 맘의 문을 두드려보았다. 점차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문제였다. 수시로 전화해서 아이의 상태를 엄마를 통해 물으셨다. 첫 시험이 중요했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는데 조금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의 불안했던 마음을 표현이라도 하듯 성적이 어느 정도 오르긴 했지만 원하는 수준만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오른 만큼의 만족감이 있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이다.

비록 썩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못 얻어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아이가 변하고 있음을... 수업시간에 느껴지는 안정감이 있었다.


여름 방학을 지나면서 차분히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더 나은 결과물을 얻어내고 싶었다. 학생 본인에게 자신감도 생기게 하고 싶었지만 그 아버님을 안심시켜 드려서 아이에 대한 간섭을 줄여주고 싶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감을 얻는 것이 보였고 공부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진 것이 보였다. 다행히도 이번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과학 성적이 특히 많이 올랐다.)


다행이었다. 그 아이에게도 다행이지만 내게도 다행이었다. 조금은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있게 되었다.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다음은 아이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공부의 맛을 본 아이는 이번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수업 시간에 책을 대하는 자세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나만이 느끼는 이 성취감을 난 요즘 만끽하고 있다. 지난주엔 가족 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아이의 엄마는 내 선물까지 챙겨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좋은 결과를 얻어 건네주신 선물이어서 기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나는 어쩌면 또 거쳐가는 징검다리 일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또다시 새로운 선생님을 찾아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요즘은 학원도 무슨 쇼핑하듯이 골라서 다닐 정도로 여러 곳이니 그 또한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인연이 닿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한동안 속 썩이는 아이들만 계속 만나다 보니 나 자신 스스로 가르침의 흥을 잃었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내어주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 아이는 자기 사촌에게도 날 소개해서 지난주부터는 그 아이도 공부하러 오기 시작했다.


나와 인연을 맺는 모든 아이들이 발전하길 바라며 그로 인해 나의 성취감도 한껏 더 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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