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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by 날마다 하루살이

건강 검진 결과서를 받으러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우편으로 신청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운동 삼아 다녀오마 하고 나섰다. 이번 주 월요일엔 전화로 확인해 보니 보내졌다는 말을 듣고 하루하루 더디 가는 시간을 겨우 참아냈는데 오늘은 금요일 더는 못 기다리겠다 싶어 나선 것이다.


"육안으로 볼 때 모양이 안 좋네요. 결과 나오면 꼭 확인하세요~"


자궁암 검사 당일 컴컴한 검사실에서 의사쌤은 친절한 듯 건조한 전달 사항을 내게 들려줬다. 갑자기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돌아와 몇 날 며칠을 가슴 졸였던가. 이 한 몸 문제 생기면 우리 집은 어찌 굴러갈까...부터 시작된 끝없는 상상들이 이어졌다. 괴로움은 결과지 받아본 이후로 미루고 당장부터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 의사쌤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번 건강 검진 때도 유방에서 의상 소견을 제시해 유방 전문 병원을 권해주지 않았던가. (물론 결과는 괜찮았다) 이번에도 산부인과는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진단이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지만 우산을 펴지 않았다. 일부러 산뜻하게 걷고 병원 문을 열었다. 내가 경유를 이야기하자 간호사는 왜 누락 됐는지 의아해하며 바로 프린트해 주었다. 결과지에 도장을 찍으며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눈치다. 나는 그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그런데 그 표정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단 몇 초만 기다리면 내 손에 들어올 결과지인데 그 새를 못 참고 표정을 살피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두근두근.. 결과지를 받아 들고 '음성'이란 두 글자를 확인했다. 휴우~ 다행이었다. 몇 주 동안 가슴 졸였던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병원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는 그대로였지만 나의 기분 상태는 달라져있었다.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집 앞 마지막 신호등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하신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윤정아~!"


나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는 분. 바로 우리 당숙모이시다.

'우리 윤정이는 똥도 버리기 아깝다'시며 엄마를 돌보던 그 시절 내게 힘을 주셨던 분이다. 따뜻하게 바라봐 주시고 꼭 잡아주시던 손길에서는 늘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그 안타까움 속에 흐르던 진심을 난 기억 한다. 결혼해 누워 계신 엄마와 신혼을 시작했던 우리 집을 일부러 들르셔서 콩이며 떡이며 나눠주시고 가신뒤에 열어보면 모르게 넣어두신 용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일 년마다 기일이면 엄마 산소를 찾는다. 다녀오는 길에 산소 근처에 사시는 당숙모 댁을 들르면 우리 4남매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신 콩, 참기름, 들기름, 찹쌀을 곱게 담은 쇼핑백 4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찾아뵐 때 작은 선물 보따리 하나 넣어 드리는 것이 고작이다. 부모 없는 것들을 이렇게 맘 써주시는 당숙모께 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우연히 내가 외출할 때 시내에 일 보러 나오시는 당숙모님을 가끔 뵐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반가이 손 잡아주시고 토닥여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도 컴퓨터 배우시고 오시는 거예요?"

"응.. 나 TV에 나왔었는데 혹시 봤냐?"

"네? 6시 내 고향 같은데 나오셨었어요?"

"응~ 컴퓨터 하는 거 한참 나왔었어~!!"

"그 시간은 바쁜 시간이라서 TV를 못 봐요."

"그래, 우리 윤정이 바쁘지. 니들 세 딸들이 어쩜 그리도 이쁘게 잘 사냐. 잘들 살아라~"

"네~에구..그러고 보니 스타시네요~~"

"내가 영상 보내줄게 봐봐~"

"네~"

"근데 어디 가세요. 이쪽 동네에 볼일 있으세요?"

"아. 우리 집 태양광이잖아. 여기 KT 2층에 '다솔'가는 중이야~"

(다솔이 있는 KT 건물은 우리 집 바로 앞건물이다)

"그럼, 일 마치시고 요 앞에서 점심으로 칼국수 같이 드시고 가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니다, 윤정아.."

"저희가 늘 받기만 해서요.."

"그런 생각하지 말어라. 그리고 나 바뻐! 할 일 많다!"


바쁘시다는 거짓말은 내게 부담주기 싫으신 마음이었다. 더는 권하지 못하고 당숙모님을 보내드렸다. 당숙모님 언제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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