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중독이 되고 싶다

신경안정제에 이은 영양제

by 날마다 하루살이
녀석은 지금 중1 성장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말고사 첫째 날 시험을 치른 날이다. 오전 시험 일정을 마치고 급식만 먹고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오지 않는다. 녀석의 친구가 나와의 수업을 마치고 우리 집을 나설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아 전화를 해보았다. 밥 먹는 중이라며 먹고 바로 갈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급식이 부실했나.. 하고 잠시 후 돌아온 녀석에게 물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탁구 치느라 급식을 못 먹어서 친구들과 라면을 사 먹고 왔다는 것이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시험 기간에 저런 여유(?)를 부리다니... 혀를 찰 노릇이지만 꾸욱 참았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차원적인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제 어느 정도 성숙된 반응을 보이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셤은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요"


나쁘지 않다...

녀석은 언제나 원하는 대답을 바로 주지 않는다.

시험 본 3과목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과학부터 묻는다.

"1개 틀렸어요."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말로는 100점짜리가 3명이라던데, 너는 아니었구나.

"엄마도 아까 셤지 보는데 헷갈리는 문제가 있더라. 혹시 그거 틀린 건가?"

녀석과의 대화를 이어보려 말을 길게 덧붙여 본다.

"24번이에요?"

"몇 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렇게 뒷번호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럼 13번인가?"

"셤지 한번 보자~"


시험 결과도 물론 관심사지만 난 요 녀석과 자꾸만 더 많이,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서술형을 바라는 엄마에게 언제나 단답형을 돌려주는 녀석. 나머지 두 과목도 점수를 확인하니 녀석 말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 같다. 말문이 트인 김에 녀석에게 또 말을 건다.


"○○, 너가 아침에 아이유의 '네버엔딩 스토리' 알려줬잖아. 오늘 너 학교 간 다음 엄마가 들어봤거든? 사람들이 왜 아이유, 아이유 하는지 알겠더라~"

"아하~"

단답형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 여름에 여행 갈 때 차에서 너가 맨날 듣는 빅뱅 노래랑 아이유 노래 들으면서 가자~"

"저는'가슴을 데인 것처럼 ~~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도 좋은데요!"

"그래? 그럼 원래 듣던 음악도 듣자~"


이야기 나누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있잖아.. 시험 잘 봤다고 하니까.. 신경 안정제 정도가 아니라 영양제 만땅으로 맞은 기분이야! 노오란 비타민을 팔에 꽂고 왕창 맞은 거 같아!! 시험 잘 봐서 기분 좋다니까 엄마 속물 같아?"

"아니요~"


아마도 엄마가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다른 것은 아닐 거야. 물론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네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았다는 거. 네가 느끼는 성취감을 엄만 기대했던 거야. 그 한두 번의 성취가 이어져 너만의 자신감으로 쑥쑥 자라길 바란다. 진심으로 널 응원할게~

오늘도 사랑한다.




<다음날 나의 마음 상태>


어제 첫날 시험을 치른 녀석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돌아온 이후 낭만적인 폰 세상을 만끽했다. 자꾸만 늘어지는 시간에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묻는다.


"○○, 오늘은 스터디카페 안 갈 거야?"

"모르겠어요."

"내일 시험 볼 것도 한 번씩은 다 본거지?"

"네~"

그래, 너가 여유 부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믿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를 쓰려면 인내도 필요했다. 난 저녁을 먹고도 한참을 더 인내의 시간을 보냈고 녀석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공부방에 들어갔다. 우리집 신경안정제가 투여되었다. 심장 박동이 안정권에 들어갔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시작 했으니 됐다.


"○○, 공부하고 자~ 엄만 먼저 잠들 거 같아~"

"네~"


부스럭거리는 녀석 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 1시쯤이었다. 지금까지 공부한 모양이라며 안심하고 잠들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새벽에 잠이 깬 시각은 4시쯤이었다. 옆 침대에 자고 있어야 할 녀석이 안 보인다. 나가보니 공부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욱~이 올라오려 한다.


으이그... 다 못 끝내고 잔 모양이네..

새벽같이 일어난 걸 보니...

그래도 이게 어디야..

목표량 채우려고 노력하잖아.

믿어보자.. 믿어보자..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잠이 오질 않는다. 폰 세상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녀석이 6시 반쯤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 못 끝내고 잤던 거야? 도덕이야 영어야?"


내 맘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발설한 말은 1초도 안 되어 전혀 다른 결과로 내게 돌아왔다.


"자다가 더워서 잠이 깨서 그냥 한번 더 봤어요~"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려던 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려, 피곤하지.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자~"


내부에서 일어났던 무수한 백조의 발차기는 수면 아래로 숨기고 우아한 백조의 모습으로 쿨하게 얘기했다.


녀석이 힘든 기색 없이 제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었다. 그래! 내가 믿었던 녀석은 변하지 않았던 걸 거야. 내가 키운 정체 모를 조바심은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녀석에게 가졌던 신뢰가 회복되는 요즘이다.


녀석, 오늘도 내게 영양제 2차 투여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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