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말이 정곡을 찌를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은 모호하던 내 생각을 단번에 정리해주곤 한다.
가장 최근에 치렀던 기말고사를 기점으로 난 정신적으로 꽤나 힘들었다. 아이들 몇몇이 너무 황당한 결과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내 기준으로 최선을 다했고 해내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내가 아이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개개인의 능력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책임을 꼬집어 묻는 부모를 만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 책임을 추궁하는 듯한 뉘앙스의 대화는 날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낯선 경험이었다. 이번에 그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도 거의 한 달이 지나도록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위로는 나에게도 필요한데... 난 상대 아이의 부모 맘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의 노력이 무시된 결과물은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뭘 더 어찌해야 하는 건지...
이럴 땐 꼭 A를 조심해야 해~ 꼭 A에서 틀리거든.
그런데 그 A에서 틀렸다.
이 문제 어려우니까 꼭 풀어봐~ 시험 전날 카톡으로 보내준 문제가 120에서 240으로 숫자만 바꿔서 나왔는데 틀렸다.
일일이 나열하면 끝도 없을 예들을 들라면 들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해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나의 고민도 깊어졌고 어느 한아이의 부모님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다. 언젠가 올 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그 순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평소 아이에게 전해 듣던 아이 아빠의 이야기로 봐서 내게 전화 한번 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바이다.
다른 학생 수업 중이었다. 폰이 울렸다. 부드럽게 시작한 듯 보인 목소리가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이의 엄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옆에 계시던 아이의 아빠께서 폰을 가로채셨다. 문제의 요지는 지금 옆에서 풀어보라고 했더니, 어제 배운 것이라는데 아이가 이걸 왜 못 푸냐는 것이다.
휴우~ 그러게요. 배운 것인데 그것도 몇 번을 풀었는데 왜 그럴까요.. ○○이보다 더 계산이 느리던 다른 친구는 계산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는데 왜 ○○이는 제자리일까요... 되려 묻고 싶었다. 답답하고 막막한 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거기에 맞게 부모의 기대치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 둘 사이에 격차가 클수록 문제는 더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한 아이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첨에 '이 아이를..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했던 아이가 몰라보게 성장했다. 물론 좀 더 노력해 주면 좋겠지만 이 정도 성장도 난 만족스럽다.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기다릴 줄 알았다. 기다려주는 부모의 아이는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매번 숙제를 체크당하고 이거는 이렇게 저거는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는 부모의 아이는 힘겨운 내적 고민까지 더해져 발전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아빠는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지를 않아요!"
"아빠가 문제집에 직접 풀래요!"
"아빠가 이렇게 그려서 하지 말래요!"
"아빠가 오늘은 수학 말고 과학 수업하래요!"
"음~~ 아빠는 진짜~~!!!"
내가 그 아이로부터 전해 들은 몇 마디만 듣더라도 난 숨이 막혔다. 그런 이야기는 나의 남편에게도 흘러들어 갔는데 나의 고민을 같이 나눠주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섞게 되었다. 그러니 그 아이의 아빠가 평소 어떤지 익히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받은 전화 내용을 잠깐 이야기했는데 역시나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서방, ○○이 아빠한테 전화 왔는데 어제 배운 걸 왜 못 푸냐시는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 아니겠어?"
"아휴~ 그걸 못 푼다고 애를 윽박지르기만 하면 돼?
가여워해야지!"
띠용~~~~
맞다!
가여워하는 마음!
내가 아이들을 만나면서 맘 깊은 곳에서부터 느꼈던 그 감정! 바로 가여운 마음이었다! 아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의 근간은 가여움이었다.
이렇게 하면 별것 아닌데 어려워하니 가엾고,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알아가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니 가엾고,
반복해서 하다 보면 쉬워지는 느낌을 알지 못하니 가엾고,
그러다 못 풀었던 것을 풀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모르니 가엾고...
내게는 온통 가여움 투성이인데 어찌 아이들을 모른다고 다그칠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아이의 아버님께 내 마음을 담아 현 상황에 대해 설명드리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님께서도 ○○이를 가엾게 봐주십사하는 마음을 전달했다.
제발 ○○이를 가여줘해주세요...
오지랖에 왠 간섭이냐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잘 받아주셨다.
고맙고 죄송하다는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남편의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을 잘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었다. 가끔 내게 유익한 한방을 날려주는 이가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