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집에 있어봐야 드나드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가족들과 과외하러 오는 학생들. 그 외엔 가끔 택배기사님이나 마트 배달 기사님일 뿐 날 일부러 문 앞에서 부르는 사람은 없다. 배달 기사님이야 올 시간 알려서 톡을 주기에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니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측할 수 없는 기척이 들리면 긴장하게 된다.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고 오는 점잖은 차림새의 어르신들인데 그분들은 내가 관심도 없는 종말이라든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쪽지를 건네주며 날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오전에 집 정리 마치고 간단히 두부를 부쳐두고 있었다. 요즘 혈당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두부를 부쳐서 먹고 있는데 요 녀석은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기척이 들린다. 잘 못 들었나 싶어서 좀 더 기다려본다. 용건이 있어서 우리 집에 온 분이라면 다시 한번 더 날 부를 테니. 잠깐의 시간 차를 두고 숨을 고르는데,
"새댁~"
이라고 부르는 어느 나이 드신 할머니의 목소리다. 옥수수 팔러 오신 할머니신가? (가끔 옥수수를 삶아서 팔러 오시는 할머니도 계신다)하며 나가보니 옆집 기름집 할머니시다.
우리 집은 2층이어서 올라오시느라 힘이 드셨는지 거친 숨을 고르시며 날 부르고 계셨다. 손에 쥐어진 고춧가루 봉지를 건네주신다. 며칠 전에 고춧가루 샀는데 왜 또 가져오셨지?
너무 감사한 일이다. 묵은 고춧가루면 어떤가 마트에 가면 묵은 고춧가루도 허다하게 그냥 팔고 있는데... 할머니 양심에 걸리셨나 보다.
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오전에 마트 배달을 시켰더니 마침 소주 상자에 배달이 도착했다. 나는 당장 주섬주섬 소주병을 한 상자 가득 챙겼다. 남편이 저녁때 반주로 마시는 소주병을 모아두었다가. 가끔 기름집 할머니 가져다 드리곤 했었는데 오늘은 내가 당장 가져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타올랐던 감정도 흐지부지될 때가 많다. 단숨에 소주병 한 상자를 들고 기름집으로 향했다. 빈 소주병이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기름병으로 쓸 소주병을 받아 드시곤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를 뵈니 또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