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행복한 이유
이제까지 평범했던 점심식사에 그 직원이 들어오고 나서는 감탄과 즐거움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어머 이 김치 색깔 좀 보세요.", "쌀국수 국물이 정말 베트남에 온 것 같아요.", "수제비에 들어 있는 바지락이 정말 싱싱하네요." 등등 항상 그녀는 식사 시간에 '감탄'으로 시작을 한다.
그녀가 감탄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 신기하게도 그 음식의 재료나 맛이 한결 맛있어지는 효과를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먹던 그 맛인데 말이다.
최근 난 우리 쌍둥이 아들 장난감을 자주 사주는 편이다. 6살이 되고 나니, 아이들의 취향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래서 아이들 장난감 고르기도 한결 수월하다.
내가 아이들의 취향이 맞추어 장난감을 사주면, 아이들은 반응한다. 그것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아이가 기뻐서 운 적도 있다. 아마도 깊게 '감탄'을 했나 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아무도 불행을 즐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행복한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상세한 방법과 경우는 각자 다르겠지만, 행복을 느낄 때 우리의 신체는 '감탄'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취향저격의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을 때나, 새로 온 직원이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의 감탄에서는 그들은 분명히 행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여행을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새로운 곳에서 자고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느끼며 아이들처럼 "우와~"라고 느끼기 위해, 즉 '감탄'하기 위해 우리는 바다로, 산으로, 해외로 여행을 가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 사는 성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삶의 감탄의 경험이 적어 보인다. 어쩌면 감탄 대신 우리는 비교라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자신도 모르게 습관화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유럽이나 미국의 식당에 방문을 해보면, 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보면서 이런저런 언어로 감탄사를 말한다. 하지만, 등산복 차림의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남들이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자신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스캔하기 바쁘다.
(원더풀, 분더바, 브라보, 스고이 등... 외국의 감탄사는 많이 들어 보지만, 한국의 감탄사는 뭐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연을 보고,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것 대신 SNS를 보며 비교하는 것을 택한 우리들의 모습에는 점점 '행복'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념의 문제도, 정치 혹은 경제의 문제도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정말 큰 문제는 아무도 감탄하지 않고 남들과 비교만 하는 문화가 아닐까?
어제 하루, 한 번이라도 감탄한 적이 있는가. 그럼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감탄한 기억이 없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만 천천히 스스로를 돌아보자. 그리고 일부러라도 감탄할 거리를 찾아 생각하며 행동해 보자.
분명한 것은 감탄은 훈련과 정성으로 갖출 수 있는 소양이다.
비로 겨울이지만,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걸어보자, 차가운 겨울 속에서 초록의 잎사귀를 발견하고 만져보기도 하고, 좋은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며, 잠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며 이렇게 잘 컸구나 라고 감탄해보자.
이렇게 감탄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더 좋은 효과는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다.
식당에 가서 "사장님, 정말 맛있네요!" 한마디만 해도 그는 단골손님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아내가 차려준 식사에 "정말 맛있어. 우와." 한마디면 가정의 분위기가 바뀐다.
우리 새로 온 직원처럼 "김치 색깔 좀 보세요."라고 하면 식사가 맛있어지고 소화도 잘 된다.
반대로 "다른 팀들은 호텔에서 점심 먹는다는데, 우리 팀은 매일 한식이네요. 아휴."라고 하면 밥맛을 어떨까?
'감탄'에는 수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