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워라밸과 스라밸
2013년부터 나는 지금 회사의 한국 지사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주재원으로 파견을 와 있다. 회사에 입사한 2009년 당시에는 한국에서의 사업 가능성은 보이지만, 한국에 지사를 설치할 정도는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 지사가 생기기 전까지는 늘 출장으로 일을 처리하다가 마침내 한국 지사 설립이 논의되면서 2012년 노르웨이 본사에서 리더십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 훈련은 나에게 큰 문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중 인사담당 임원의 말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말했다.
“리더는 80%만 일해야 합니다. 남은 20%는 무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꿈을 그려야 합니다. 그 20%의 시간이 리더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리더십 훈련에서뿐만이 아니었다. 2013년 9월 한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일본 지사의 사장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100%를 일하는 사람은 시급제 사원이라면, 리더는 꼭 20%의 시간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리는 신조어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워라밸’일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인데, 여기엔 일이 우선인 삶보다 잘 쉬고 충전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개념이 깔려있다. 개인과 회사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주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개념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일의 능률도 오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어른들이 ‘워라밸’을 외치고 있는 사이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공부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주 100시간 이상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들에겐 아직 워라밸이 먼 얘기처럼 들린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면서, 자신들이 살아 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아침 일찍 시작해 밤늦게 끝나는 지금 한국의 교육 제도는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다.”
어른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외치고 실현하고 있는 지금 우리 아이들은 공부와 삶의 균형에 대한 생각조차 못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매일 학교와 학원에서 지낸다. 부모들은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기까지의 시간을 참고 견디면 그 이후에는 잘살게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견뎌 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대학이 인생의 종착점이 되는 시대가 아닌 평생 학습의 시대다. 또한 사회와 기업에서는 점점 더 공부보다는 창의적이고 협력하는 인재를 더욱 가치 있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스라밸(Study & Life Balance)’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공부와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입시를 위한 공부에 쏟는다. 학생들이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로 틱 장애나 불안, 강박증 등을 앓기도 하고, 청소년 자살률 또한 매우 높은 편이다. 아이들에게도 공부 시간 외에 취미 생활, 친구와 노는 시간, 자기 인생의 비전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노르웨이에서 배웠던 리더에게 필요한 20%의 시간은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에 리더가 되기 위해서도 똑같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는 우연히 개미를 관찰하다가 20%의 개미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개미들은 생산성 없이 그저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어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20대 80의 법칙, 일명 파레토의 법칙을 만들었다. 이는 우리 삶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백화점 매출의 80%는 상위 20%의 고객에서 나오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주로 입는 옷은 전체 옷의 20%이고, 스마트 폰의 많은 어플리케이션 중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약 20%정도라고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자유로운 20%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아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 말이다. 최근의 입시 무한 경쟁 시대에서 남들보다 20%의 시간을 공부 아닌 다른 곳에 투자한다는 건 어쩌면 큰 낭비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회사의 리더가 되고 업무 역량의 20%를 미래를 꿈꾸고 인생 전반을 훑어보는 시간에 써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꿈을 꾸고 취미에 투자를 하고 친구와 함께하는 20%의 시간이 쌓여 결과적으로 인생의 80%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보고 도전해 보고 실패도 해보고, 실패 원인을 파악해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여유롭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도적으로 공부도 하고 새로운 가치관 그리고 목표를 갖게 할 수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뭐든지 도와주고 싶고 해결해 주려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엄마의 정보력을 이용해 공부 계획을 짜고 이 학원 저 학원을 데려다 주는 ‘운전사 부모’, 24시간 아이들을 감시하고 아이 인생을 설계하는 ‘헬리콥터 부모’,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길을 닦아 놓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대신 도와주는 ‘불도저 부모’, 아이들의 생각을 가두어 놓고 대학을 인생의 목표로 공부를 시키는 ‘교도관 부모’, 아이들이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걸 미리 완벽하게 계획하는 ‘제설차 부모’ 까지, 이러한 말들을 떠올리면 부모 입장에서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부모로서 아이가 실패와 상처를 겪는 걸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조급한 마음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앞날을 그려보게 하려면 미래를 직접 그려주는 부모가 아니라 함께 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기 도와주고 언제든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친근한 부모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바쁜 스케줄을 짜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하는 부모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나는 때때로 친구들과 육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이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들은 지시와 통제가 아니라 아이들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면서 아이들의 손을 조금씩 놔주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격려하고, 축하하고, 함께함으로써 아이들이 자기 삶에 열정을 갖고 살아가고, 자기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자기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단기적으로 대학만 가면 끝나는 시대는 끝났다. 평균 수명도 100세로 늘어났다. 아이를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아닌 마라톤 선수로 키워야 한다. 트랙에서 달리는 100미터 달리기 선수는 전략이나 분석보다는 스피드에 집중한다. 하지만 장기전인 마라톤은 도로의 구성, 날씨, 주변 선수에 대한 전략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준비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환경에 대한 준비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믿고 20%의 시간을 남겨주면 어떨까? 이 20%의 시간이 아이를 정말 크게 자라게 해줄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CEO가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