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 게 맞을까?
1:1의 만남을 좋아한다. 서로를 낯선 존재로 인지하는 감각에서 태동되는 어색함과 긴장감, 잔잔한 설렘들을 좋아한다. 서로를 향한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질문으로 채워지는 대화를 좋아한다. 어떤 주제와 관심사에 대한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를 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결을 구분하고, 적합한 언어를 선택하고, 강도를 조절해야 하는 숙명이 생겼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모든 것을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이전에 맺었던 관계도 새롭게 만나는 관계에서도 심지어 같은 페미니스트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들과 소통하고 관계의 결을 맞추기 위한 다중언어를 습득해야만 한다. 이 숙명이 때로는 나를 지치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며 내보일 수 있는 심도 있는 질문과 대답들이 즐겁고, 나라는 사람을 천천히 보여줄 수 있는 속도감을 좋아한다.
그 질문이 감정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두려워진다. 지금 나의 감정과 욕구를 인지하고 이를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이 어렵다.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어렵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감정을 감정으로써 터트리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화가 난 '이유'를 조목조목 상대에게 전달할 수는 있지만, '나 지금 화가 나. 슬퍼.'라는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감정을 감정적으로 표출하지 못한다는 것이 자칫 모순같이 느껴지지만 나에게는 감정의 표효가 여전히 낯선 개념이다.
엄마는 감정에 무척 솔직하다. 화가 나면 화를 표출하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좋으면 웃음을 터트린다. 뒤끝 없이 순간순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온 부정적인 감정들은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런 엄마의 감정이 노출되는 지점과 순간들에 나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엄마의 감정이나 기분을 알아차리기 전에 엄마의 감정은 급하게도 먼저 터져 나온다. 청소년기 무렵 한창 불같은 사랑을 하던 엄마에게 굳이 연애담을 듣지 않아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방에는 항상 엄마와 엄마의 애인들이 함께 했었고, 항상 방문 밖으로 들리는 말소리에서 그들의 현재 상황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시작한 연애에서 매번 애인들은 세심하게 나의 기분과 상황을 읽어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차분하네’, ‘아까는 조용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좋아졌나?’하는 말들로 항상 나의 기분을 살피기 바빴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항상 같은 강도와 기분으로 상대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기분이 좋고 나쁘다는 것을 감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의 감정과 기분을 읽어내려고 살필 때마다 묘하게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빴다. 나는 평소와 같은데.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데. 왜 다르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이 보는 나는 무엇이길래, 그들에게 나의 중간값은 무엇이길래.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자꾸만 내 기분을 살피며 나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그들이 나도 모르는 변화와 낌세로 나의 세세한 감정들을 읽어내려고 할 때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억눌러지고 무뎌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눈치채고 억지로 밖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었다. 페미니즘이 이야기하는 가치와 목소리가 당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솔직하지 못한 이유였다. 나는 화가 났다. 이 세상에. 여성 혐오로 점철된 역사가 짜증이 났고, 여전히 ‘여자답게’, ‘남자답게’를 강요하는 세상이 짜증 났다. ‘’이제는 여자가 더 살만하지~’’라는 말에 담긴 의중이 불편하고 역겨웠다. 나의 가정환경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도록 만들어놓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불편했고, 같은 여성들과의 연대가 가능하지 않도록, 엄마를 미워하도록 만드는 이 가부장제가 끔찍이도 불편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 이런 감정들을 토로하고 꺼내놓는 게 불편하다.
엄마. 나는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 것이 맞을까? 엄마가 열 달 동안 배 속에서 품었던 페미니스트 딸은 이렇게도 솔직하지 못해. 여전히 나는 어려워. 내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토로하는 것이 어려워. 그냥 슬프면 슬프다고 엉엉 울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이유를 찾지 않고 소리 지르고 싶어. 우리는 어쩜 이렇게도 다른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