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국이 뭐 별건가
봄과 함께 3월의 대학은 모든 장소들을 연애를 위한 곳으로 재구성한다. 개강 후 동시다발적으로 캠퍼스 커플들이 등장하고 와중에 "10학번에 누구랑 사귀었던 그 오빠가 알고 보니 이번 신입생이랑 사귄다더라", "ㅇㅇ이랑 사귀었던 애가 그 동기인 ㅁㅁ랑 바람을 폈다더라"와 같은 온갖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한다. 과에서 돌고 도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친구 중 한 명은 꼭 이런 말을 외쳤다. "뭐 동물의 왕국이네 아주!!" 지금 생각해도 그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 그런데 동물들이 정말 그렇게 관계를 맺나?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 거야? 인간도 동물인데. 이성이 뭐 그렇게 별거라고. 어차피 다 지들 편한 데로 해석하고 붙이면서.
어느 날 엄마와 티비를 보면서 밥을 먹다가 엄마가 뜬금없이 말했다. "야 D 기억나?" 당근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안방에서 새어 나오던 희희낙락한 D와 엄마의 소리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니까. "응 당연히 기억나지 왜?", "너 그 맥주 이모 알지. 걔 그 맥주 이모랑 사귀잖아."
맥주 이모는 엄마가 근무하는 마트에서 주류 코너를 담당하던 엄마의 직장동료였다. 대학 다니며 엄마 찬스로 엄마가 근무하는 대형마트에서 종종 아르바이트를 했던 20대의 나는 당연히 그 이모를 알고 있었다. 20대 여성이 마트에서 할 수 있는 알바 중 가장 페이가 센 알바는 주류 시음이었다. 엄마와 똑 닮은 나는 이미 '유제품 코너 W여사의 딸'로 소문이 나있었고, 여러 평판을 고려하여 방학마다 내려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열심히 맥주를 팔았다. 맥주 이모 또한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인맥으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의 일면이 그러하듯 상대적으로 편하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맥주 이모가 엄마의 전 애인인 D와 사귄다고?!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동물의 왕국'이 떠올랐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다는 스토리는 1020세대가 흔히 보는 웹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보지 않는 막장드라마에서 나오는 소재이거나.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모든 드라마의 막장 같은 전개가 단순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이성으로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에 '막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조금은 유쾌한 목소리로 이 사실을 전달하는 엄마가 낯설었다. "엄마 맥주 이모랑도 친하잖아.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묻는 나의 대답에 엄마는 웃으며 답했다. "난 이미 헤어졌고 두 사람이 사귄다는데 내가 뭘 어쩐다냐? 그 둘도 내가 이어 준거야."
맥주 이모와 D는 엄마가 조직한 술자리에서 만났고, 맥주 이모가 D에게 가진 호감을 솔직하게 엄마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엄마는 D의 폭력성과 단점들을 짚어가며 맥주 이모를 말렸으나 이미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 이모는 그마저 감수하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엄마의 말을 처음 듣고 '동물의 왕국'을 떠올렸던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 관계에서 피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진작 D와 관계를 정리했고, 맥주 이모가 D에게 호감이 생겼고, 엄마는 그 두 사람을 연결했다는 사실 그뿐이었다. 모두가 행복해진 이 관계를 단순히 '동물의 왕국'으로 정의하는 것은 편협하다. 인간들이 규정해놓은 '상도덕'의 영역은 절대적인 규범이 될 수 없고, 말 그대로 '상대적인 규범'일뿐이니까. 특히 연애를 비롯한 섹슈얼리티의 영역은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