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3이 되었을 무렵 당시 엄마가 사귀던 D가 군입대를 했다. 그가 엄마와 어떻게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도선수로 활동하던 그는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군입대를 준비하게 되었고, 마흔을 바라보던 엄마는 그와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 엄마의 나이차보다 나와 그의 나이차가 더 나지 않았던 D와 엄마의 연애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뭐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이 내 몸을 휘감았던 당혹스러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D와 엄마의 연애사실은 엄마가 D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연애를 했었던 Y와의 연애가 정리되어가면서 Y는 우리들의 주거공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성인 남성이 없는 집에 익숙해질 찰나에 갑자기 들어온 D의 존재는 낯설고 거북했다. 검은 피부에 짧은 머리, 큰 키와 찢어진 눈을 지닌 D는 딱히 호감형의 외모를 지니지도 않았고, 안방을 타고 거실로 넘실거리는 엄마와 D의 희희낙락한 소리에 나는 신경이 거슬리고 열이 받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돈이 없이 없었던 16살의 청소년일 뿐이었고, 이 집을 나가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 그냥 참을 수밖에.
지금 와서 당시를 상기해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면서도 새삼 그렇게 어린 남자와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엄마의 매력이 뭘까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50이 넘은 지금도 '아름다움'이라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엄마는 작은 키에 얇은 뼈대, 발랄하고 밝은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었고, 엄마에게서 나오는 밝은 에너지는 나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여전히 집으로 낯선 이들을 데려오는 그 예의 없음과 침해당한 나의 경계, 대책 없이 사랑을 퍼부었던 당시 엄마의 연애를 돌이키면 나는 다시 또 아찔해지는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D는 병역의 의무를 지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가 입대하고 자대 배치를 받으며 엄마는 약 2주간의 기간마다 D에게 소포를 부쳤다. D에게 소포를 부치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는 날은 엄마의 카트 바구니에 내가 먹을 소소한 간식과 먹거리를 슬며시 밀어 넣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엄마 애인의 군입대 간식을 사는 날 먹을 것을 슬며시 카트에 밀어 넣는 내 모습을 다시 생각하니 애잔하면서도 아찔하다...
딱히 요리실력을 갖추기 어려웠던 나는 대충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베이컨과 소시지, 햄, 냉동식품, 대용량 나쵸와 치즈를 엄마 몰래 대충 카트에 쑤셔 넣기 일수였고 그 결과 지금도 베이컨과 소시지, 햄은 굳이 쳐다보지도 않는 재료들이 되었다. 폭력은 항상 관계 내에 잔존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폭력은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든다. 사춘기 자녀에게 나초와 나초 치즈를 한 아름 안겨놓고 매번 연애하느라 바빴던 엄마도 나에게 물리적· 정서적 · 심리적 폭력을 선사한 것이다.
점점 머리가 커가며 나 또한 차갑고 날이 선 말로 엄마의 가슴을 후벼 파기 일 수였다. 사랑하지만 또 너무 증오했던 우리의 관계는 근래에 들어서 지난 상황들에 미안함을 표출하는 엄마를 보며, 분노와 애틋함의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하는 나 자신을 보며 조금씩 회복되었다. 회복과정에서야 지난 일들이 나에게 큰 상처이자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의 연애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D의 존재는 앞으로 지속될 엄마의 삶에 꽤나 자주 등장하며 영향을 미쳤다. D는 엄마에게 연인도 아니었으나 친구도 아니었고,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던 관계는 모호함 속에서 늘어지고 늘어져 어느 날 흔적도 모르게 사라졌다. 엄마의 연애를 복기하며 다시 한번 느낀다. 이 참을 수 없는 관계들의 허망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