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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Mar 26. 2021

애인들과 '친구'로 남기가 가능할까

근데 그게 진짜 '친구관계'일까?

친구로 남은 애인이 한 명도 없다. 자잘한 미련들로 헤어진 이후 몇 번의 연락이 오간 적은 있지만 모두 남이 되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남이 되고, 함께한 시간의 깊이만큼의 친밀감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게 항상 이상했다. 어쩌면 정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상대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일며 헤어짐 이후 남이 되는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일상의 중심이었던 사랑을 치워내고, 텅 빈 공간을 만들어내야 할 때 어정쩡하게 남아있는 상대의 존재가 오히려 지저분한 흔적들을 남기는 것 같아서.


엄마는 종종 헤어진 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체로 엄마의 연애는 미련의 미련이 반복된 싸움을 반복하다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황들은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었지만 당시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시화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한 치정 싸움, 사랑싸움으로 데이트 폭력을 인지했던 당시에 엄마의 애인들은  앞에 찾아오는 것은 기본이며, 전화를 피하는 엄마가 끝끝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 엄마의 핸드폰은 방전되기  수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직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엄마 또한 새벽 내내 상대에게 전화를 걸고 소리를 치며 마지막까지 분노를 표현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랑과 이별', '사랑과  떨어짐'이라는  수많은 스펙트럼 사이를 오가는 연애였다.


지지부진한 관계를 끌어가는 엄마의 연애를 바라보며 '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칼에 잘라낼  없구나'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연애의 마지막까지도 엄마의 사랑은 폭발하는 감정들, 지저분하고 추잡한 정들을 끝끝내 이어가며 소강되었다.


지난한 데이트 폭력의 연속적인 상황을 돌이켜보면 너무 아찔하다. 나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가 호명되고 정의된 사회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항상 적법한 선을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나름의 방식으로 규칙을 만들고,  선을 넘어오려는 애인을 강력하게 저지하고 밀어내며.


내가 맺는 관계에서 폭력의 문제를 세심하게 성찰했던 나는 정작 엄마가 맺는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의 개념에 대해 세심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엄마의 연애를 사랑싸움이라고만 이해했다.  앞에 찾아와 나에게 '엄마가 집에 있느냐' 물어보는 엄마의 애인들이 지긋지긋하고 짜증 났다. 엄마의 사랑싸움이 나의 일상을 방해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에는 여성폭력이라는 명확한 구조로 태동된 폭력의 일상화가 자리하고 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그들과 친구로 남은 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지켜야 할 아이가 있고, 일터가 있고, 많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중년 여성이 당시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협상이었다. 물론 서로의 밑바닥으로 치닿는 관계 속에서 감정들이 소강되며 미련 하나 없는 건조한 마음이 친구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이 친구 관계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면 나는 헤어진 이들과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깔끔히 정리하고, 추억으로 남겨놓을 때 더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 특히 관계적 측면에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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