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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Aug 27. 2019

'김치녀'를 쓰는 너는 '좋은 남자'가 아니다.

젠더호명과 여성혐오


카페에 앉아 친구와 대화 중 소개팅을 하는 듯 보이는 옆 테이블의 남성이 말한다. 

"인상이 너무 좋으시네요. 소개팅은 처음인데 사실 겁이 좀 많이 났어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워낙 '김치녀'같은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ㅎㅎ 저는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기쁘네요." 

맞은편 여성이 어이없는 얼굴로 대답한다. 

"그걸 칭찬이라고 하시는건가요...?"


아마 저 남성은 이 여성이 다른 여성들과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남성의 말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1) 김치녀와 된장녀는 사치스러운 여성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리고 그 사치는 그녀가 남성에게 기생하여 받은 돈이라는 것을 전제하거나, 돈도 없는데 치장에 집착하는 허영심을 비난하기 위한 정당한 처사라며 애써 포장되고는 하였다. 지금까지도 남성들은 '된장녀와 김치녀'를 메두사처럼 기피하고 무서워하며 혐오적 명명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제 여성혐오의 대표 상징격인 이 용어를 대놓고 사용하는 남성들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시대는 계속 변하니까.


대신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올려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남성들을 종종 보고는 한다. "이렇게 개념없는 여성들도 많다더라, 그런데 너는 아닌 것 같아." 혹은 자신은 아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인간임을 증명한답시고 "이렇게 개념없는 여성들이 여전히 세상에 많아~ 우리는 그러지 말자."라는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어법을 여성들이 전혀 칭찬으로 받지 않는 이유는 그 남성이 정해놓은 주관적인 기준에 벗어나는 순간 바로 '된장녀와 김치녀'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그런 여성이 아니야'라며 본인의 편협한 기준 안에서 여성들을 판단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순간 '아닌 줄 알았는데 너도 된장녀였네'라는 호명을 붙인다.

아주 좋아하는 씨냉님의 그림:)


한창 된장녀 담론이 유행하던 시절, 여성들은 괜찮은 여성이 되기 위해 즉 '김치녀와 된장녀'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해야 했다. 그리고 같은 여성 집단 안에서도 그러한 '된장녀'와 같은 여성들을 비난하기 급급했다. '여성'으로 묶이는 범주 안에서 내가 된장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을 '된장녀'로 만드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성녀'와 '창녀'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여성에 대한 범주는 항상 이분법적이었다. 성녀는 '창녀'가 있어야만 '성녀'가 된다. 마찬가지로 '개념녀'는 '된장녀'가 있어야지만 그 가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김치녀와 개념녀라는 극도의 편협한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여성들은 김치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념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자체는 남성들의 시각에서, 남성들의 언어로 정의된다. 심지어 누군가를 김치녀와 개념녀라고 명명하는 기준조차 매우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열 명의 남성을 만나는 여성은 그 열 명의 남성들에 의해 '김치녀'가 되기도, '된장녀'가 되기도 한다.


2) '김여사'라는 호명 또한 '여성'에게만 향하는 언어이다. 거칠게 운전하는 남성들에게는 그 어떠한 호명도 붙지 않는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여성들은 '운전을 못한다'라는 편견이 오랜 기간 작동해왔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운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사고를 낼 가능성이 더 적을 수도 있다. 운전을 잘하는 능력과 감은 타고날 수 있지만, 그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과연 '성별'뿐일까? 나아가 '여성'을 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기에 '여성은 운전을 못한다'라는 전제는 틀린 전제이다. (또한 서울 시내를 운전해본 사람이라면 택시기사들의 무리한 끼어들기와 차선변경, 두 차선 점령하기 등등... 운전을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넘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여성들이 운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미숙한 운전자들의 성별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저 지레짐작으로 '김여사'라고 호명하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침투하고, 혐오적인 발언을 마치 공기처럼 일상적인 언어로 정당화한다.


호명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여성에게 한 번 호명이 붙는 순간, 전체 여성을 향한 과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 전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며 다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기제로 작동한다.



최근 '한국 남자'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코드가 된 것은 그래서 더욱 이례적이다. 남성들은 성별을 이유로 하나의 범주로 가치 절하를 당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심지어 호명에 담긴 남성비하와 혐오를 느껴본 적도 없다. 김치남과 된장남 또한 된장녀와 김치녀라는 워딩에 분노한 사람들이 성별만 바꿔 부착한 호명일 뿐 남성에게 향하지 않는 언어였다.


페미니즘 운동과 실천은 단기적이고 장기적인 것부터, 거칠고 온건한 것까지 그 결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혐오적인 워딩들이, 젠더를 기초로 파생되는 다양한 차별적 언어들이 서로에게 향하지 않게 사멸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는 이미 공기처럼 익숙해진 여성에 대한 온갖 혐오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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