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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Aug 23. 2019

유흥(遊興)은 '여성'이 있어야 완성된다

클럽문화 속 성적거래의 문제

유흥은 유를 일으키는 것이다. 언어 그대로 즐기고 떠들고 소리지르고 노는 것 (遊, 유) 그리고 이를 일으키는 것(興, 흥) 즉 신나게 노는 것이 곧 유흥이다. 그러나 한국의 청춘들에게 '논다는 것'은 무엇으로 의미화되고 있는가? 수많은 술집과 클럽, 헌팅문화가 시사하듯 한국에서 유흥은 곧 술과 이성으로 연결된다.


유흥문화는 그 자체로 성별성을 전제한다. 유흥은 여성과 남성이 만나야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유흥문화가 이익을 창출하는 중심에 '여성의 몸'이 있다는 사실이다.



유흥문화는 자유롭고 평등한 두 이성 사이의 성적만남을 청춘만의 특권으로 명명한다. 유흥문화는 여성과 남성의 만남을 주선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1990년 이후 한국의 성 해방은 개방적인 섹슈얼리티 문화와 유흥문화를 조직하고, 성적 욕망의 실천을 당연한 권리로 전환했다. 기존의 성이 성적 욕망을 위험하고 금욕적인 것으로 다뤄왔다면, 성 해방 이후에는 쾌락적이고 소비적인 성이 생활 양식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나이트 클럽은 억압적인 성적 규범에서 벗어나 성적 욕망과 실천을 상징하는 해방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최근 승리의 버닝썬과 정준영의 강간모의, 마약스캔들, 성접대 등 잇따른 성범죄가 발생하면서 클럽에 담긴 젠더폭력의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다. VVIP들이 여성들을 제공받고 약물강간을 일삼았다는 폭로는 클럽문화가 젠더를 중심으로 ‘공급되는 자’와 ‘공급받는 자’를 분리해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클럽 안에서 조직된 성범죄들은 청춘들의 자유이자 권리로 이해되던 ‘유흥(遊興)’이 사실은 매우 불공정한 거래임을, 공급되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속될 수 없는 '자유'임을 폭로한다.


유흥문화의 '자유'는 결국 남성들의 소비를 유도할 수 있는 ‘여성’들의 존재에서 구축된다. 특히 클럽은 입뺀을 통과한 검증된 여성을 조달하고, 그들을 '선택'할 수 있는 남성들의 자본을 통해 구축된다. 즉 ‘돈이 되는’ 여성의 신체를 검증하고, 철저한 젠더수행을 전제함으로써 ‘돈을 쓰는 남성’과 ‘돈을 쓰게끔 만들어야 하는 여성’이라는 구조를 생산한다. 

네이버 웹툰 [정년이] 18화_ 글 서이래 / 그림 나몬.


‘돈이 되는 여성’을 조달하려는 노력은 입뺀문화 그리고 여성게스트 무료입장이라는 모순 속에서 들어난다. '여성'은 돈을 내지 않고 클럽에 통과할 수 있지만, '모든 여성'들이 이를 보장받지 않는다. 경호원들에게 '검증받은 여성'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러한 전략은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제공되는 극진한 대접으로 왜곡된다.


다양한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클럽은 쾌락적인 성을 추구하는 청춘의 상징이 되었다. 클럽은 돈을 매개로 몸과 서비스를 거래하는 성매매와는 구조가 다르며, 여성과 남성의 자유로운 성적 실천과 거래를 위한 장으로써 기능한다. 한국의 유흥문화는 ‘자유로운 성적 실천’을 내세우며 자유와 쾌락, 해방이라는 감각을 제공하지만, 여성들의 자유는 남성의 시선으로 ‘검증’받은 한에서만 획득된다. 즉 남성들에게 자유는 돈과 등치되어 확보되는 ‘선택 권력’이며, 여성들의 자유는 남성의 시선에서 평가되는 신체 자본의 검증에서 비롯된다.


유흥의 의미 자체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성애 섹슈얼리티 안에서 구축되고,
‘조달되는 여성’과 이를 ‘선택하는 남성’이라는 두 축이 고정된 이상
유흥문화를 단순히 개인들의 자유로운 성적 실천이자 거래로 함축하기는 어렵다.


모든 욕망이 허용된 화려한 파티공간에서 클러버들은 “내일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즐기며 규범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감과 자유는 역설적으로 철저한 젠더수행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젠더를 축으로 기획된 유흥문화는 화려한 상징과 여성에 대한 위계를 통해 성적존재로서의 욕망을 생산하고, 쾌락과 해방감을 판매하며 이윤을 창출한다. 이렇게 명백한 성별규범은 유흥문화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자유’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 염려되어 덧붙인다면, 이 글은 클럽문화를 좋아하는 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철저한 젠더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유흥의 자유라는 역설과 여성거래의 문제를 통찰하기 위한 글이다. 이미 유흥의 개념에 들어간 '자유'는 '자유'가 아님을 따라서 그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그 개인들의 잘못이자 문제로 떠넘겨서는 안된다는 지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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