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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Sep 02. 2019

낭만적 사랑, 그 환상을 넘어선 연애

낭만적 연애에 담긴 젠더수행

연애는 어렵다. 특히나 이성애 연애가 굳건한 현실에서 규칙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더욱 어렵다. 연애에 대한 환상과 낭만을 조장하는 콘텐츠가 범람하는 현실을 넘어서기는 더더욱 어렵다.


낭만적 사랑을 환상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낭만'이 자본주의 소비구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24k는 못해도 14k 금반지라도 맞춰야 하고, 낭만의 중심에는 기념일에 주고받는 값비싼 선물이 자리하고, 여전히 "예쁜 여성을 쟁취하는 돈 많은 남성"이라는 공식이 확고하다. 이 공식은 남성들로 하여금 돈 많은 남성이 아니라, 돈이 없으면 연애를 해주지 않는 '여성'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개념녀와 김치녀를 가르는 이분법을 생산한 원동력이다.


연애의 진정한 재미는 결국 소비이다. 낭만은 ‘돈'이 없으면 표현될 수가 없다. 정성 어린 100마리의 종이학과 촛불 이벤트에 놓인 꽃 한 송이는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다. 노력대비 받는 사람한테 남는 물질적인 것이 없다. 종이학 접을 시간에 뼈 빠지게 알바를 해서 작은 선물을 사는게 더 성공적인 이벤트다. 꽃 한 송이를 사려해도 돈이 필요한 세상에서, 꽃 한 송이의 가치는 꽃 열 송이의 가치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는 현실에서, 우리의 낭만은 곧 '돈'이다.


낭만이 연애의 정석이 될 때, 이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은 모두 '낭만이 없는 것' 혹은 '가난한 것'으로 취급되고는 한다.


20대 중후반에 (요즘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더라...!) 은반지를 맞춘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고, 가령 은반지를 맞추려 한다면 타인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을 위한 두 갈래 중 하나는 '돈은 없지만' 나를 지극정성으로 배려해주는 애인이며, 다른 하나는 굳이 값비싼 금반지를 원하는 타인들을 사치스러운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논쟁은 개념녀와 김치녀라는 젠더호명으로 연결되며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 주는 대립으로 연결되어 왔던 듯 보인다. 그러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영페미니스트들에게 낭만적 사랑과 연애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애초에 돈도 없는 주제에 연애를 하려고 했던 놈, 가성비를 운운하며 여성들을 김치녀와 개념녀로 나누고, 여성들을 대립하게 만들어온 놈들. 그 놈들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그런데 그런 놈들이 아직 세상에 차고 넘치니 결국 비혼과 비연애를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 말에도 무척 공감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여성혐오와 젠더호명의 역사,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영페미니스트의 부상, 연애가 '소비'로 등치된 자본주의적 연애구조가 한데 얽혀있다. 남성들이 김치녀와 개념녀를 가르며 가성비를 운운해 왔던 것은 현실이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이분법으로 연애의 가성비를 운운하는 남성들의 울분은 연애관계의 시작과 끝이 모두 '돈'으로 연결된다는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러한 분노가 젠더호명을 통한 여성혐오의 역사로 연결되는 고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요지는 연애관계 안에서 남성들이 불쌍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을 돈과 소비로 연결하는 자본주의 문화에 편승되어버린 연애문화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랑의 크기가 소비를 통해서만 증명되어야 하는 건지 물어야 한다.


데이트를 하면서 맨날 김밥만 우적거릴 수 없다. 가끔씩은 고기도 썰어야 하니까. 맨날 집 근처 공원에서 노상이나 깔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여행도 한 번씩 가줘야 하니까. 그런데 김밥만 우적거리고 근처에서 노상만 까야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사랑에 대한 감정과 욕구가 있다. 왜 가난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나고 사랑해야 할 감정까지 포기해야 하는 건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물론 연애를 안 해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요점은 누군가의 온기와 손길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를 왜 가난이라는 이유로 억눌러야 하는가에 있다.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온갖 콘텐츠가 조장하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환상이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온갖 맛집과 데이트 장소, 여행 장소들이 범람하고 '사랑받는 여성'과 '사랑을 주는 남성'이라는 젠더규범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소비로 등치 되는 낭만적 연애와 사랑은 철저한 젠더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랑받는 여성'과 '사랑을 주는 남성'이라는 규범에 속하지 않는 연애는 그 정당성을 타인에게 설명해야 한다.
"너는 돈도 없는 남자랑 왜 만나?", "남자가 너에게 쓰는 돈이 곧 너에 대한 사랑의 크기야", "너는 돈도 없으면서 여자를 왜 만나냐?", "와 돈도 없는 너랑 만나주는 그 여자는 리얼 개념녀다"와 같은 말들. 그리고 이러한 말들에 "아니 돈이 다가 아니고......@@@%&*%%$#$$%%" 주절주절 그 연애를 설명해야 하는 현실.


궁극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젠더호명과 젠더수행을 기초로 한 낭만적 연애의 환상들은 이러한 '낭만적 연애'를 조장하는 현실을, 돈이 개인들의 감정과 관계까지 결정짓는 현실을 하나도 바꾸지 못하기에 문제적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고,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과 연애가 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정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돈도 없고 가성비나 운운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머리에서 사랑과 연애라는 것이 무엇으로 정의되어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 낭만적 환상이라는 관념이 만들어내는 젠더수행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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