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천에 사는 여동생이 여름내 농사지은 햅쌀 두 자루와 각종 생산물을 가지러 오라고 해서 아내와 가지러 갔었다. 풋호박 서너 개, 고구마 한 박스, 파, 총각김치용 무,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생특유의 콩자반, 깻잎장아찌를 잔뜩 싫어주는 거였다. 유독 음식솜씨가 좋아서 콩자반은 타우 추종을 불허한다. 네가 콩자반, 깻잎 반찬만 만들면 내가 유통을 책임질 테니 한번 해 보자고 보챌 정도다. 그 정도로 손맛이 좋다.
특히 #콩자반은 정말 이제는 먹어 보기도 힘들다. 도시에서 검은콩을 삶아서 만든 콩자반이 있는데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어머니가 간장에 졸여서 만든 짭짤하고 뒷맛이 고소한 노란 콩자반을 더 좋아하는데 동생이 아주 똑같이 만든다. 특히 콩자반이 당뇨에 치료에 좋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유독 더 좋아한다. 그걸 동생이 알고 두어 됫박의 콩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한 달 정도 먹을 량을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 내가 동생한테 만드는 법을 꼭 배울 생각이다. 당뇨 환자도 많고 콩자반은 국민반찬으로도 잘 어울린다. 오래 질병 없이 건강 사는 게 화두인 세상이라 동생의 실력이면 대박도 가능하다. 그런 동생이 여섯 살 때도 요리를 했었다. 그때가 떠 올라 눈물 속에 그려본다.
또다시 저 기억 속을 들어가 시린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내어 봅니다. 무슨 글을 쓰든 유년의 흉터들, 그것들을 꺼내지 않고는 글을 쓴다고 하기가 두렵고 또 나의 글쓰기 습작에 완성을 기하기 위함이니 이해를 바란답니다. 앞으로는 아프고 시린 기억보다는 훈훈하고도 재미난 이야기가 주류 일 것 같습니다. 또 그다지 과거 지향주의자는 아님을 밝힙니다. 마음에 응어리도 아니고요. 그냥 성장기의 응고된 흉터를 정리해 두고 싶습니다.
십오여 년 전 산과 들이 바짝 마르던 봄날, 동해에 낙산사 까지 잡아먹던 산불, 기억 나시지요? 그 산불을 보면서 저는 초등 일 학년 시절 겨울이 떠올라 와서 몸서리를 쳤답니다. 이 세상에 화마처럼 무서운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저 어린 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학년 방학, 첫겨울에 몸서리를 치도록 여동생과 함께 무서운 경험을 했답니다. 아마도 여동생은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올라가던 때였지요. 혹독하게 춥던 겨울의 이야기이고 그 일과 함께 여동생의 기구하고도 고생스러웠던 삶......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조차도 상상이 되지 않을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으니까요.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마음까지 시려오면 연약하셨던 어머니는 몸져누우셨고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은 아궁이에 땔 나무가 한아름도 없었다. 따라서 방바닥은 차디찬 냉골이었다. 땔감을 해 올 사람이 없었다. 냉골의 방에서 끙끙 앓으면서도 어머니는 땔감 걱정에 한숨을 연신 토해냈고 우리 집의 커다란 아궁이는 우리들 만큼이나 배가 고파 큰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마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월이었고 나는 갈퀴질로 엉성하게나마 솔잎과 낙엽들을 긁어와 땔감을 이어가던 혹독한 겨울이었다.
칼바람이 몹시도 차게 불어오던 날, 끝내 우리 집에는 땔감이 떨어졌고 나는 여동생을 데리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앞산으로 땔감 나무를 하러 갔다. 물론 유품 같은 아버지 지게를 키가 작아 질질 끌며 간 거였다. 아버지의 단 하나 유품이 지게와 낫이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장갑도 없어 손이 견디기 어렵게 시렸다. 동생도 추위에 울쌍이었다. 너무나 추워서 동생에게 다시 집에 가서 성냥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언 손으로 나무를 할 수가 없었다.
산자락에서 약간 벗어난, 누런 금잔디가 듬성한 밭뚝을 택해서 불을 붙였다. 언 손을 녹이던 것도 잠시 휙휙 부는 바람에 삽시간 불은 빨간 혀를 낼롬 거리는 마수가 되어 사방으로 번졌고 놀란 우리 남매는 옷을 벗어 휘둘렀지만 빨간 화마는 마른나무 가지들을 낼롬낼롬 잡아먹으며 휙휙 산으로 번졌다. 우리는 불을 끄다 말고 너무나 무서워 그만 불길을 피해서 엉엉 울기만 했다. 고사리 손으로 역부족이었다. 불은 산으로 번지며 기세등등하게 타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를 본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조그만 앞동산 하나를 홀랑 집어삼키고 사람들의 힘에 불은 꺼졌다. 화마의 공포와 어른들의 질책이 무서웠던 나는 훌쩍이며 울기만 했다. 누군가 내 주머니에서 성냥을 뺐었다.
어른들은 내가 가지고 간 아버지의 지게와 낫, 그리고 그을음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누구도 야단치지 않고 혀를 차기만 했다. 명백한 화인의 주인공이었지만 입을 떠억 벌리고선 우리 집의 현실이 보여서 그런지 야단을 치지 않았다. 그리고 추우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라며 웃옷을 벗어 입혀주는 어른까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훌쩍거리기만 했다. 날은 어두워 오고 있었고 냉골에 누워계신 어머니와 막내 네 살짜리 남동생 얼굴만 떠 오를 분이었다. 문제는 춥고 시린 오늘밤, 우리 집의 안방은 꽁꽁 언 냉골이 될게 뻔했다. 어머니는 연신 기침을 토하며 끙끙 앓으실 테고.
어른 한분이 내게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아니 얘야 오늘 혼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울면서 말했다.
"오늘 집에 땔 나무가 하나도 없단 말 이에요"
산불사건 며칠이 지나자 마을어른들이 하루씩 시간을 내어 내가 태운 앞동산의 죽은 나무를 톱으로 잘라다 장작으로 쪼개어 헛간에 쌓아 주었다. 장작으로 일이 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엄청난 양이었다. 정말이지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 였다. 겨울 아침이면 나는 졸린 눈을 깜박이며 장작불을 지폈고 철부지 여동생은 보리쌀을 씻어 밥을 했다. 태우고 질고 엉망이었지만 나와 남동생은 잘 먹었고 어머니는 항상 안쓰러운 얼굴로 밥을 뜨는 등 마는 등 하셨다. 여섯 살짜리가 한 밥치고는 너무나 잘했던 밥이었다. 그건 분명했는데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여섯 살짜리 여동생이 밥을 했다는 게. 그러나 기억은 분명히 난다. 엄연한 현실의 기억이다.
그해 봄 어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먹을 것도 없는데 여동생 하나는 남의 집으로 입양시켜 보내라고 매일 그랬다. 입하나는 줄여야 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앞날이 캄캄했던 엄마는 기어이 결정을 하고 말았다. 입을 하나 줄이는 게 아들 둘을 살리는 거라는 말에 결정 굳히신 거였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봄날, 여동생은 집에 없었다. 도시의 어느 부자 집에 양녀로 갔다 는 거였다.
그날부터 다시 어머니는 앓아누웠다. 딸이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여동생을 데리고 나간 마을의 아저씨는 남은 자식들이나 걱정하며 살라고 설득을 했지만 허사였다. 어머니는 밤마다 여동생 입양을 소개한 아저씨네 집을 찾아가서 딸을 데려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한 달을 미치셔서 돌아다니시다시피 하니까 할 수 없었던지 동생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에서 보다 알록달록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늘 동생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답니다. 내가 잘 되면 아버지처럼 잘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지요. 지금 동생들은 다 나보다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이 덜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빠로서 걱정은 여전하답니다. 그 동생이 고사리 손으로 밥쌀을 씻었던 때가 떠 오르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답니다. 그리고 눈물이 고여 듭니다. 여기에 이제 여동생 이야기를 털면서 유년의 아픈 가정사는 줄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재미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쓸 거랍니다. 이제는 사랑 그리고 행복에 걸맞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올리며 이 세상을 사랑하렵니다. 특히 걷기 시작하면서 걷기 예찬론에 푹 빠졌으니 걷는 이야기가 주류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산티아고 순례길 도전기도 쓸 것이고 무심천의 여름을 쓰면서 드러낸 한 가난한 가장의 세상살이도 아직 조금 더 남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