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始發)의 10월, 번외 | 속도를 줄이세요!

시발(始發)의 10월, 2020 | ep.02 / 번외 편

by 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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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많은 2년 차, 속도를 줄이세요!"

열정 가득한 나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사고를 낼 수 있는 무한한 열정에 현실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는, 같이 액셀을 밟아줄 누군가가 없었다는 것.


수, 목, 금, 토, 일. 5일의 긴 연휴 전, L프로젝트 제안을 해 줄 수 있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연휴를 빼면 정말 짧은 마감 시간이었지만 뭔가에 홀린 듯 이 프로젝트가 너무 하고 싶었다. 레퍼런스가 잘 쌓이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의 욕심과, 해당 건의 상반기 마케팅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는 것, 비딩 건이 아니지만 나름 높은 매출, 하반기에 더 안 좋은 프로젝트를 할 여지가 있으니 이 프로젝트로 끝내자는 생각. 이 모든 생각이 복합적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제가 할게요!, 제가 연휴에 작성해 올게요!'를 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외치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면, 나의 리더의 성향으로 봤을 때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팀에 계시는 매니저님께 연락해서 이번 한 번만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다. 매니저님은 미안하다고 하셨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은 안될 것 같다고. 사실 예상한 일이었고 이전에 충분히 마음을 설명해 주셨기에 매니저님에 대한 미움도 아쉬움도 없었다.

이전에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Y수석님께 연락을 드렸다. 너무 흔쾌히 도와주신다고 해서 마음이 든든했다. 이전에 함께 했던 L인턴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진짜로 연휴 중에 만났고, 열띈 토론과 회의, 그리고 수다를 떨었다.


제안서 작성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5일의 연휴지만, 그중 2일은 원래 쉬는 날이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2일은 나의 체력이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결국 1안의 제안은 완성했지만, 다른 제안은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월요일을 맞이했다. 오전부터 회의를 할 생각으로 출근했지만, 세상에! 수요일이 제안 마감인 페이퍼에 팀장님께서는 아파서 재택근무를 하신다고 하신다. 게다가 출근을 하자마자 받은 메신저는 '연휴 동안 좋은 아이디어 안 나왔지?'였다. '많이 생각했니?', '나는 잘 생각이 안나던데'도 아닌 '안 나왔지'라니! 그 순간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작성한 페이퍼를 전달했다. 이때부터가 문제였나 보다.


팀장님은 나의 페이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제안을 전문으로 쓰는 다른 팀과 쓸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이미 연휴 전부터 컨택이 되어 있었다고.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될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때부터 이미 내 마음은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고, 그 물거품이 눈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팀장님, 제 제안서가 그렇게 별로인가요?'


팀장님은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다였다. 어떠한 객관적인 평가도 없었다. 그냥 정말 이게 다였다. 그 순간부터 화가 났다. 차라리 제안서가 왜 별로인지, 현재 업무 케파 때문에 혼자 작성은 못하니 다른 팀과 이어서 작성하면 어떨지, 연휴 중간에라도 다른 팀과 컨택해 두었으니 회의 준비를 해 오라고. 이렇게만 말씀해 주셨어도 화나지 않았을 것이다.


팀장님께 하고 싶으신 대로 두었다. 결국 오후로 회의 시간을 정했다. 더 이상 묻기도, 설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모든 시간이 무시받은 느낌이었기에.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난리가 났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내가 완벽하게 하지 못했고 내 능력의 부족이기에 팀장님의 탓만도 할 수가 없는. 그런 복합적인 모든 상황에 화가 났다. 이런 상태로 하루가 흘러갔고, 타 팀과 회의를 했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너무 그만두고 싶었다. 어떻게 시작을 했던, 지금 내 상황이 더 이상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너무 상담이 필요했다. 옆 팀의 K수석님께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말씀드렸다. 이런 상황이라, 프로젝트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언이 필요합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렸고, 수석님께서 말씀하셨다.


'3가지의 방법으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데, 그중 1가지를 골라라. 첫 번째, 회사 입장에서 이야기해 줄 수 있고, 두 번째, 좋은 선배의 입장에서 이야기해 줄 수 있고, 세 번째, 그냥 정말 친한 친구처럼 욕하면서 편들어 줄 수 있다.'


나는 첫 번째 조언을 골랐다. 두 번째 조언은 다른 분들께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 내 마음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계속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이 상황이 끝날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솔직한 조언을 들었다. 물론, 이 상황에 대한 리더의 판단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네가 열정적으로 멋대로 시작한 일에, 멋대로 그만두게 된다면 그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수석님은 말씀하셨다. 관점을 조금 바꿔 생각해 보라고, 이번 일을 계기 삼아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너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퇴근길 회사 앞, 인턴이 갑자기 말했다. '매니저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힘내세요!'라고.

그 순간 너무 미안했다. 내가 오늘 하루 나한테 신경을 쓰느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치는지 몰랐구나.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신경 썼을까.


지하철에서 내린 퇴근길, 안양천을 하염없이 걸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첫째, 성급했던 나의 답 없는 열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둘째, 하지만 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한 시발점(始發點)도 나다.

셋째, 정말 객관적으로, 타 팀과의 협업으로 인하여 더 좋은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

넷째, 다음에 이런 프로젝트가 들어온다면, 다시는 같은 프로세스를 반복하지 않겠다.

다섯째, 내 주변에는 나를 생각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내 잘못은 인정하고, 주변의 고마움도 인정하고, 남 탓을 안 하니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또 다 네 탓만 하냐고. 남 탓을 해서 잠시 기분이 나아지는 것보다 다시 이 시점을 되돌아봤을 때, 그래도 이 경험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이 상황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내가 되고 싶기에 지금은 나의 탓을 하고 싶다.


오늘도 많이 배웠다. 이제, 조금 속도를 늦춰 주변을 세세하게 둘러볼까 싶다.


※ 해당 글은 2020년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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