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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Jul 22. 2024

마음 읽기 잔혹사

 "아오... 그놈의 마음 읽기..."




교사로 근무 중인 친구가 결국 폭발했다.

마음 읽어주기 때문이었다.


잘못한 학생을 훈육했는데 몇 시간 후 아주 예의 바르고 정중한 전화를 받았단다.

 "선생님, 저... 제가 서율이를 훈육하는 방법을 써보시겠어요? 저는 평소에 서율이 마음을 읽어주거든요."


부모는 친구에게 아주 공손하게 '마음 읽기'의 방법을 일러주었단다.

마치,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일 뿐, 알게 되면 이 비밀의 명약같은 훈육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듯 말이다.


그러나 학부모들도 책 몇 권, 동영상 몇 편으로 뚝딱 익히는 육아 트렌드를 교사가 모를 리 있겠는가.

몇 년 째 핫하게 학교를 괴롭히고 있는 훈육 방식의 메커니즘을, 교사들은 이미 잘 안다.

오용하거나 남발하지 않을 뿐이다.


몇 년에 걸쳐 비슷한 민원을 받아온 친구는 결국 폭발했고, 입바른 소리를 와다다 쏟아냈다고 한다. 굳이 가정에 통보하지 않고 있던 아이의 문제 행동부터 마음 읽기의 한계까지 말이다.


어머님은 결국 "어머, 선생님. 우리 애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며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떤 부모들은 마음 읽기를 육아의 교리로 떠받든다. 그 이유를 대충 넘겨짚어 보자면,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고(맞는 말이다), 부모와의 애착 및 신뢰형성도 중요하며(맞는 말이다), 단단한 신뢰관계 속에서 사랑 받고 자란 아이는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테니(그럴 거 같다),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마음을 읽어주자!(갑자기요?) 뭐 이런 논리가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윗 문단을 읽는 동안 눈치챘겠지만 나는 마음 읽기에 딱히 조예가 깊지 않다. 그 양육법이 어디서 탄생했고 어떤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지 모른다.

대신 실제 용례는 아주 잘 안다.

마음 읽기 창시자나 마음 읽기 척척 박사님조차도 이게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 어떤 괴상한 모양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모를 거다.

하물며 부작용에 대해선 말해 뭐하겠는가.

나는 권위자다.  

나는 어설픈 마음 읽기가 아이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지 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부모에게 늘 마음이 '읽히고', 그들로부터 모든 감정이 수용되어 온 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순간 억울한 일이 많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인이 아이라고 생각하며 읽어 보길 바란다.


1.

하영이가 깐족대서 하지 말라고 했다. 근데도 또 그랬다.
너무 열받아서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한 대 쳤다.
그 애가 자기 엄마랑 선생님한테 이르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엄마가 물었다.
"하영이 왜 때린 거야?"

"아, 걔가 먼저 나한테 깐족댔단 말야.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구! 걔 맨날 나한테 시비 걸어. 내가 뭐 맨날 참기만 해야 해?"

"그랬어? 우리 윤우가 하영이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때리기까지 했겠니."

"그러니까. 내가 뭐 가만 있는 애 때린 것도 아니잖아."

"그렇네. 다 이유가 있었네. 엄마가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볼게. 우리 윤우 그동안 하영이 땜에 많이 속상했겠구나."
역시 난 잘못이 없다.

다음날, 학교에 갔다.
근데 선생님은 무조건 친구를 때리지 말라고만 한다. 저 자식이 먼저 깐족댔다고 말했더니 걔도 혼내긴 하는데, 나도 똑같이 혼낸다. 게다가 억울해서 좀 큰소리를 냈을 뿐인데 예의가 없다고 더 혼났다. 왜지? 선생님은 날 차별한다. 억울하다.




2.

마트에서 소릴 좀 지르면서 뛰어 다녔다. 아빠가 말했다.
"우리 윤우가 소리를 지르고 싶구나.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 목이 아프지 않을까?" (놀랍게도 실제 들은 말)
"안 아픈데?"

난 다시 뛰었다. 아빠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차가 밀려 버스에 몇 시간이나 앉아 있느라 너무너무 힘들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어수선한 틈에 친구를 툭 치고 도망갔다. 진짜 10초도 안 뛰었는데 선생님이 뭐하냐고 소릴 질렀다. 주차장에서 뛰면 위험하단다. 내가 도로에서 뛴 것도 아니고, 그거 하나 못 피할까봐 저렇게 혼을 내는 건가? 몇 시간 앉아 있다 보니 답답해서 친구한테 장난 좀 친건데, 학교도 아니고 무슨 현장체험학습까지 와서 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맨날 나한테만 그런다. 짜증난다.

 


3.

역할놀이를 했다.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 끝내주게 연기할 자신이 있다.
친구들도 다 주인공 역을 맡고 싶다고 해서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다.
내가 졌다. 나는 대사도 몇 줄 없는 나그네 역을 맡았다.
하기 싫다고 했다.
친구들이 나한테 뭐라고 한다. 가위바위보로 공정하게 정한 건데 왜 안하냐고 따진다.
지들은 지들 원하는 거 했으면서 나한테만 그런다.
 
애들이 선생님한테 일렀다.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기에, 나그네 역은 하기 싫다고 했다. 근데 공정한 방식으로 정했고 이건 수업활동이니 나한테 그걸 그냥 하라는 거다.
싫다고 했다. 그래도 하란다. 내가 싫다는데 왜 시키는거지? 우리 부모님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 쉬라고 하신다.
근데 선생님은 왜 강제로 시키지? 진짜 열받는다.





이 세 가지 상황을 교사의 시선으로 보자.


1.

윤우가 친구를 때렸다. 왜 때렸냐고 하니 걔가 먼저 놀렸단다. 그래도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고 하니 씩씩거리며 자긴 억울하단다. 윤우는 늘 자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기가 원하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지도하기도 힘들고 행동 개선도 이뤄지지 않는다.

오후에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를 혼냈냔다. 윤우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폭력적으로 행동하니 가정에서 지도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어머님이, 그런 경우엔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물어보고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란다.

그렇지만 윤우는 혼날 일을 했다.
하영이에겐 윤우를 놀린 잘못이 있고, 윤우에겐 하영이를 때린 잘못이 있다.
친구가 괴롭힐 땐 하지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라고 수도 없이 교육했다. 게다가 윤우도 평소 하영이를 놀려 왔다.

"어머님, 학교에선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고 교육합니다. 아무리 때리고 싶어도 때리면 안 돼요. 아시잖아요."

"선생님, 근데 윤우도 행동의 이유가 있잖아요. 왜 그건 고려 안 하시고 무조건 걔 편만 드세요? 윤우가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어요?"

"...네 어머님, 일단 알겠습니다. 윤우랑 얘기해 보겠습니다."

설득할 힘이 없어 일단 전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부모가 아이의 훈육을 원하지 않으니 하지 않기로 한다. 윤우는 앞으로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친구들을 때리고 다닐 거다. 부모가 허락했으니까.



2.

현장체험학습일, 야외 활동엔 위험 요소가 많아 며칠 전부터 안전 교육을 반복했다.
게다가 난 혼자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을 관리해야 한다.
그 애들 중 한 명이라도 다치면 직을 내려놔야 할 지도 모른다.
 
뒷반 버스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데 윤우가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사방팔방 뛰었다. "박윤우!!!" 소릴 질러도 듣지 않는다. "박윤우!!!!!!!!" 한 번 더 소릴 지르니 날 쳐다본다.
"지금 뭐하는 거야? 주차장에서 뛰어 다니면 어떡해?"
놀란 나머지 굳은 표정으로 소릴 질렀다. 윤우는 입을 삐죽거리며 날 째려 봤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야외활동을 하는 건, 정말 너무 힘들다.



3.

역할놀이 연습 중, 3모둠 아이들이 우르르 내게 왔다.

"선생님, 윤우가 자기 역할 싫다고 안한대요."
"뭐? 왜? 너네 역할 어떻게 정했어?"
"가위바위보 하기로 해서 가위바위보로 했어요."
"근데 왜 안한다는 거야? 혹시 누가 반칙하거나 규칙 안 따랐어?"
"아니요. 저희 다 공정하게 정했는데에..."
"아, 알겠어. 선생님이 윤우랑 얘기해 볼게. 윤우야!"

몇 번을 부르자 혼자 엎드려 있던 윤우가 투덜대며 나왔다.

"윤우야, 무슨 일이야? 역할극 하기 싫어?"
"저 나그네 하기 싫어요."
"그래, 그건 알겠어. 근데 가위바위보로 정한 거라며. 혹시 가위바위보 할 때 문제 있었어?"
"... 그건 아닌데 저는 다른 역할 하고 싶어요."
"그랬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건 다른 친구들도 다 똑같잖아. 모두가 다 원하는 역할을 맡을 수는 없어. 다른 친구들도 그냥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하는 거야."

"전 안할래요."
"이건 수업이잖아. 네가 하기 싫다고 안 해도 되는 거야?"
"안 할래요."

윤우는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로 쉬는시간까지 운 적이 있다. 모둠 친구들은 결론이 어떻게 날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윤우를 위해 다른 아이들이 공정하게 정한 역할을 바꿔줄 순 없었다. 살다 보면 원하는 걸 다 얻을 순 없다. 그러나 윤우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그 애는 입을 닫았고 내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아이들이라도 역할극을 해야 했다.

"얘들아, 나그네 역할 다른 친구가 대신 해 줘. 1인 2역 해."
"네!"
"윤우야, 참여하기 싫으면 오늘은 참관만 해."
윤우는 책상에 엎드렸다.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오후, 부모님께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그 정도로 싫어하면, 역할을 바꿔서 역할극을 두 번 할 순 없었냐는 거다.

그렇지만 수업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아이들이 자기의 욕망을 조금씩 누르며 양보했다. 그 애에게만 특권을 줄 순 없다고 했다. 모든 아이들에게 원하는 역할을 부여하며 하루종일 역할극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머님은, 상황은 알겠는데 애가 너무 서운해하며 집에서 울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은 100% 만족해서 그걸 열심히 했을까요?'

말하려다 말았다. 소용없다는 걸 안다.






부모의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다.


1.

아이가 친구를 때렸단다. 그럴 애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싶어 이유를 물었다.

하영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단다. 그럼 그렇지. 우리 애가 이유 없이 그럴 애는 아니다.

윤우의 마음도 분명 편치 않았을 거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그동안 참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이 찢어진다.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담임은 하영이도 잘못했지만 윤우도 잘못했단다. 윤우도 그동안 하영이를 많이 놀렸다는데, 담임이 애들 일을 어떻게 다 안다고 그 애 편을 드는지 모르겠다. 내가 듣기론 하영이가 평소 윤우를 많이 괴롭혔다.
게다가 안그래도 속상할 아이를 혼내다니, 아이들한테 애정 없는 교사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2.

현장체험학습에 다녀온 윤우 표정이 안 좋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면서 혼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소리까지 질렀다고?"

아연실색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주차장에서 뛰어서 혼났단다. 아이는 버스에 있는 동안 멀미도 하고, 너무 답답했던 터라, 내려서 신나는 마음에 몇 초 장난을 쳤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 안전이 중요한 건 안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 소리까지 질러야 했나? 사람도 많은데?

아이가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옆에 가서 좋게 말해주면 될 걸, 정말 세심하지 못하다.


3.

윤우가 오늘 역할놀이를 못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하지 말랬단다.

그럴 리가 있나 싶어 물었더니, 자기가 정말 하기 싫은 역할을 억지로 시키려고 했단다.

가위바위보로 정하긴 했는데, 자긴 정말 하기 싫었단다. 선생님한테 싫다고 말해봤냐고 물었더니, 말씀을 드렸단다.

"근데도 하라고 하셨어?"

"어. 정 하기 싫으면 하지 말래서 안 했어."

세상에, 이건 학습권 침해가 아닌가. 게다가 고작 역할놀이가 뭐라고, 아직 어린 아이인데 원치 않는 역할을 맡으면 싫을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애를 수업에서 배제시킨다고?

역할을 바꿔서 두 번 발표하게 하는 정도의 센스도 없나? 요즘 시대에 저렇게 강압적인 선생님이 있다니, 손이 떨린다. 민원을 넣어야할지 고민이다. 맘카페에 물어봐야겠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자, 학부모들이 가장 쉽게 놓치는 건,

친구들의 시선이다.



1.

윤우가 하영이를 때려서 하영이가 울었다.
쟤네는 맨날 싸운다. 매일 서로 시비걸고, 욕하고 때린다.
이번엔 윤우가 좀 심하게 때리긴 했다.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야단쳤는데,
윤우가 선생님께 "아, 쟤가 먼저 시비 걸었다구요!" 하며 소릴 질렀다.

웃긴다. 지도 맨날 시비 걸면서.
그리고 아무리 친구가 시비를 걸어도 때리면 안 된다. 난 그렇게 배웠다. 분명 윤우도 같이 배웠다.



2.

현장체험학습날, 버스에서 내려 줄을 섰다.
생각보다 날씨가 더웠다. 다같이 줄을 서서 이동해야 한다. 친구들이 떠드느라 줄서는 게 늦어져서 좀 짜증이 났다.

선생님이 갑자기 내 뒤를 보며 소리를 지르셨다. 뒤돌아봤더니 윤우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 진짜 왜 저래...'

나도 답답했고, 나도 뛰고 싶다. 다같이 이동해야 해서 참고 있는 것 뿐이다.

윤우 때문에 우리 반은 맨날 늦게 이동한다.



3.

윤우 때문에 역할극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
분명 가위바위보로 역할을 정하기로 해놓고, 나그네 역할이 됐다고 하기 싫다는 거다.
나도 할아버지 역할을 하기 싫다. 그렇지만 그게 규칙이니까 하는 것 뿐이다.
 
다른 모둠은 다 연습을 하는데, 윤우는 하기 싫다고 자리에 엎드려서 대사도 읽지 않았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한참이나 상담하시다가 결국 윤우를 빼고 하라고 하셨다.
연습 시간 다 지나갔다. 그게 뭐라고. 그냥 하면 되지, 진짜 짜증난다.

오늘은 짝꿍을 바꾸는 날이다.

윤우랑은 안 됐으면 좋겠다.


교사는 어른이니, 아이를 다독일 수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자기와 '같은' 조건을 가진 친구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는 모습을 보면 곧장 반발감을 느낀다.


어떤 아이들은 그걸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어떤 아이들은 숨기고 있다가 그 애와 짝꿍이 되는 순간 눈물을 줄줄 흘린다.


아이가 학교라는 '사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는 대가는, 주로 교우관계로 치르게 된다.


부모가 아무리 가정에서 아이의 감정을 존중해주어도,

아무리 지시 대신 부탁을 하고, 야단치는 대신 사랑만 주며 키워도,

아이의 세상은 아름다울 수 없다.


모든 지시에서 납득할 이유를 찾고

모든 행동에서 정당한 핑계를 찾는 아이는

세상은 원래 조금씩 손해 보고 조금씩 양보하며 산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고, 그 결과 여지없이 친구들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게 된다.


 



친구가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단다.

예약해둔 식당에 갈 시간이었는데, 한 아이가 자긴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 거다.

어린 아이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서서 기다렸는데,

그 애 엄마가 자기 아이와 눈을 맞추고 무려 30분간 아이를 설득하더란다.


"으응, 윤재야, 가기 싫어? 그렇구나. 그럼 뭐하고 싶은데?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일단 밥부터 먹고 하면 안될까? 싫어? 으응, 윤재가 지금은 배가 안고픈가보구나. 그런데 다들 기다리고 계시잖아. 그래도 싫어?"

하고 쩔쩔 매면서 말이다.


모두가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가 그걸 하기 싫을 순 있지만, 부모가 빌고 빌며 아이에게 이유를 납득시키고 허락을 구할 일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순 없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면 부모로서 단호함을 발휘할 때였다.


이렇게 끝도 없이 자신의 행동이 이해받는 경험을 한 아이는, 세상에 규칙이 있긴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수용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니 부모와 같은 반응을 기대하며 학교에서 행동한다.

선생님이 하기 싫은 공부를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요."라고 말한 후 선생님이 자기 기분을 풀어주고 납득시켜주길 기다린다.


그런데 친구들도 받아주지 않고 선생님도 받아주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마음을 바꿀 때까지 설명해주었는데, 왜 속상한지 들어보고 이해해줬는데, 친구들과 선생님은 날 모른 척하고 할 일을 한다.


아이는 선생님이 자기를 차별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자기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데, 수용해주지 않으니 매사에 억울해 한다.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부모님이 화들짝 놀라며 아이의 감정에 다시한번 공감해주고, 학교에 연락하여 대신 해결해준다면, 아이는 한층 더 억울한 아이로 자라난다. 역시 내 행동이 잘못된 게 아니었는데 선생님이 나만 싫어해서 그랬던 거라고 확신한다.


생각해보라.

똑같은 행동을 해도 이렇게 반응이 다른데,

가정과 학교를 오가는 아이가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비슷한 학생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항상 억울한 아이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떼를 쓰고, 울고, 입을 삐쭉거리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공동생활의 규칙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


또래 아이들과 관계가 좋지 못한 건 당연하다. 게임이나 모둠 활동을 할 때마다 부딪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사랑받으며 단단하게 크라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모든 감정이 충실히 읽혀온 아이들은 주로 '억울한' 아이로 큰다.  


그래도 난, 가끔 그 애들의 억울함에 공감이 되기도 한다.


그런 훈육방식을 선택한 건 그 애가 아니니까.

그 애도, 그렇게 유약한 아이로 자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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