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니오.
친구에게 심리상담을 추천받았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꽤 도움이 된단 거였다.
나라에선 우리가 맞는 걸 막아줄 수 없으나 얻어맞고 나면 치료를 지원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듣는 즉시 애용하는 몇 가지 쌍욕이 튀어나왔지만, 미치지 않기 위해선 그런 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심리 상담소에 찾아 갔다. 방이 세 개쯤 있는, 집 느낌의 사무실이었다. 바닥엔 두툼한 베이지색 러그가 깔려 있었다.
헐, 러그 청소 어떻게 하신 거지?
러그에 꼬인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손으로 뽑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그걸 처분했던 나는 소장님의 청소비법이 궁금해졌다. 러그 청소법에 대한 가설을 세우기도 전에 소장실 문이 열렸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인 듯한 소장님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서 날 보며 방긋 웃으셨다. 소장님의 안내에 따라 난 작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상담실로 들어섰다.
사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건 내 오랜 고질병이다.
친하지 않을수록, 상대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 걸 잘해낼수록 그렇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 만났으니 속이는 것도, 찔리는 것도 있을 리 만무한데 눈은 정신없이 사방을 탐색했다. 소장님은 그 행동에 담긴 내 심리마저 읽어버리겠단 듯, 반달 눈으로 날 꾸준히 응시하셨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게 후회됐다. 안면근육은 제멋대로 구겨져갔다. 길어지는 침묵을 참다 못해 커피 빨대마저 잘근잘근 씹기 시작한 나에게 소장님이 말씀하셨다.
"심리상담을 왜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음..."
내가 껴안고 있는 문제들이 저마다 손을 들었다. 난 그 중에서 '불안'의 손을 가장 먼저 끄잡았다.
"불안을 너무 많이 느껴요."
내 불안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엄마 곁을 떠나 어린이집에 가는 것도, 다른 애들처럼 재롱잔치 무대에 오르는 것도 나에겐 언제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런 꾸준하고도 막연한 일상의 공포를 제하고 나면, 가장 또렷하게 남은 기억은 아홉 살 쯤이다.
난 IMF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됐다는 뉴스를 보고(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겠지만) 부모님께 편지를 써달라고 했었다. 엄마는 갑자기 웬 편지냐면서도 정성들여 편지를 써 주셨는데, 사실 그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을 추억하기 위한 용도였다. 아홉 살이었던 내 눈에 이 세상은 곧 망할 것 같았고, 그럼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편지는, 어쩌면 세상에 혼자 남을지도 모를 내 처지를 대비한 발칙한 준비물이었다. (물론 편지는 얼마 못 가 잃어버렸다. 덤벙거림 또한 오래된 내 특성이다.)
기질과 환경의 환장할 콜라보 속에서 난 무슨 선택을 하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대비하는 습관을 키워왔다. 혹여 지하철에 문제가 생길 것까지 대비해 늘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도착하는 것부터,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더 일찍 마감일을 맞춰 놓고 미리 완료해 두는 것까지 말이다. 심지어 수능 준비를 할 땐, 언어 영역 시간에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 막고자 전체 문제를 두 번씩 푸는 전략을 택하기도 했다. 처음엔 대충 풀고, 두 번째에 꼼꼼히 푸는 전략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적어도 한 번은 풀었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거다. (난 이 회심의 전략을 대학 합격 수기를 발표할 때 얘기했는데, 강당에 모인 재수생들의 분위기가 실시간으로 거지같아지는 걸 느꼈다.)
어쨌거나 그런 습관들은 삶을 사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면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고 할 말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렇게 대부분의 변수를 고려해 살다 보면 쓸데없이 허둥댈 일을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는 덤이었다.
그런데 교사가 된 후로는 변수에 대비한다는 게 불가능해졌다. 아무리 조심해도 스무 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없고, 모든 학부모의 각기 다른 요구 사항을 수용할 수 없으며, 그러다 누구로부터 어떤 종류의 괴롭힘에 시달릴지 예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7월 즈음엔, 업무 중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을 때 날 보호해 줄 기관도, 시스템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 후로 한동안 맨몸으로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듯한 감각에 시달렸다. 열심히 좌우를 살피며 걷겠지만 언젠가는 차에 치일 수밖에 없는 환경. 그러니 오늘도 누가 날 치고 지나가지 않길 운에 기대어 기도하는 나날들. 예기치못한 재난처럼 들이닥친 일들로 일상이 무너져가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불안은 극에 달했다.
내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소장님은 "음...", "아..." 하며 고개만 끄덕이실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 이쯤에선 대답을 해 주시겠지, 하는 순간에도 그랬다. 내가 문제를 털어놓으면 전문가처럼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걱정을 씻어내려 주리라던 기대는 조금씩 무너졌다.
아무리 떠들어대도 별다른 답이 돌아오질 않으니, 역설적이게도 난 더 내 속을 터놓았다. 소장님이 침묵으로 내버려두는 시간 동안 방황할 내 눈동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장은 평가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점차 안심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장님은 내 말 중간중간 짧은 공감과 함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셨다. 그 흐름에 따라 얘기하다보니 나는 학교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가족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 갑자기 어렸을 적 이야기를 했다. 고작 오십분 만이었다.
소장님은 그 날 심리상담 끝에, 몇 가지 심리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다. TCI와 MMPI-2, 문장완성검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적나라하게 보고받게 되었다.
발가벗은 정신상태로 응답했으니 나름의 각오를 한 상태였음에도 '이 정도라고...?' 싶었는데,
어떤 상태인지는 다음 주 수요일에 쓰도록 하겠습니다.(급존대) 지금은 벌써 화요일 밤이기 때문이지요... 브런치에서... 독자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서두르라고...... 해서......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구차)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