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을 때
블로그에 일상을 털어놓게 된 건 주간일기 챌린지 덕분이다. 오른손에 연필을 쥘 때 엄지손가락을 나머지손가락 안으로 집어넣는 습관과 거센 필압으로 15분만 글을 써 내려가도 엄지손가락의 첫마디는 욱신댄 지 오래였다. 손으로 직접 쓰는 일기는 관둔 지 한참 되었다.
매일의 일기에 의지하게 된 건 아마 작년부터일 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기치 못한 상실로 힘들어할 때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상실 그 자체보다도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고 금방 무력해졌다. 퇴근 후엔 이불 속에 들어가 나만의 동굴을 파놓고 어떤 점이 문제가 되길래 자꾸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지, 비슷한 경험을 쌓아왔으면서도 왜 전혀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는지 자책하기 일쑤였다. 사람이 좋아 사람을 다루는 직업을 선택하고도 왜 왜 왜 사람 앞에서 매번 속수무책으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기를 반복하는지. ㅡ 사실은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ㅡ 문제가 되는 그 부분을 떼어놓고도 그걸 나라고 얘기할 수 있는지. 결코 아름답게 공생할 순 없는 건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은 나를 전혀 지켜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상담을 받아야하나 아니면 약이라도 지어먹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친구가 좋은 제안을 해주었다. 찢어버려도 좋으니 뭐든 적어보라고. 일단 밖으로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그때 그때의 나를 정상궤도로 되돌려놓기 쉽다고. 그 이후로 나의 오랜 친구인 불안강박을 떼어놓기 위해 ‘쓰기’를 선택했다. 다시 읽기에 낯부끄러운 아주 날 것의 이야기들은 A4용지나 컴퓨터 메모장을 켜 빼곡히 적어놓고 찢어버리거나 가차 없이 딜리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헐거운 뜰채에 담아 한 톤 낮추고 반짝이를 뿌려 블로그에 기록했다. 그렇다. 보정된 비명에 가깝다. 크고 작은 나의 비명이 모여 일상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 되었다.
미래에 저당 잡혀 현재를 헌납하는 생을 살아온 지 오래였는데 일기를 쓰며 현재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조금 유치하게 말해보자면 브이로그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양 이 장면엔 이런 독백을 넣어줘야지 생각하며 일상의 챗바퀴에 형형색색의 꽃잎을 깔아주었다. ㅡ 꽃잎을 깔아주는 도구로 헤드폰을 살까 고민 중이다. 일상의 순간순간 외부를 차단시켜 나의 시야만 확보할 수 있도록 ㅡ 그렇게 쌓은 현재가 과거가 되면 미래의 현재를 응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는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굳이 3인칭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내가 그리는 대로 방향이 정해지고 의미 부여하는 만큼 깊게 혹은 얕게 남는다. 사건의 경중은 내가 그걸 얼마나 길게 성의껏 묘사하는지,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지에 있다.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납작하게 만들어 엑스트라 23 쯤으로 만드는 게 어떨지에 대한 생각도 이 즈음 했다. 동시에 정말 소중한 걸 지키려면 짧고 산뜻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도. 이 때쯤 알았다.
만으로 서른, 8년 차 사서교사.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겼다. 하루에 책을 백 권쯤 꽂아야 하는 직업을 가졌고 글 쓰는 취미를 가져서일까 ? 손가락 마디마디가 바늘로 쑤시듯 아파서 잠에서 깬 이후로 유독 핸드폰이 무겁게 느껴진다. ㅡ 이건 바로 .. 아이패드를 사라는 계시 ? ㅡ 손가락 관절은 점점 물러지는데 사람들에게 손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자꾸자꾸 하고싶어진다. 상처받을걸 알면서도 여전히 흐물흐물 익힌 토마토처럼 속내를 내보이고 싶어. 전략적인 행동이 결국엔 유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머무르고만 싶다. 흐흐 .. 아픈 손가락을 위하는 마음과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교차하는 순간처럼 인생은 선택과 절충의 연속. 모순들의 교차점의 모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