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전야

by 조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완벽한 데이트를 완성해 줄 멋진 옷을 고르기 위해 옷장 앞에 섰다. 내일은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시간 단위로 빼곡히 일정이 짜여있고 맛집 예약까지 성공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급 오마카세에 어울리는 옷을 생각하며 옷장을 열었다. 눈앞에 보인 건 절반 정도 채워진 황량한 붙박이장. 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옷을 안 산지는 꽤 되었고, 최근에 안 입는 옷들까지 정리했으니까. 후보로 점찍어둔 두 벌만 멀쩡히 있으면 된다. 어라, 이건 예상 못 했다. 후보 1번은 기억과는 다르게 군데군데 낡아 있고, 후보 2번은 불어버린 내 몸을 감당하기에 조금 빠듯해 보인다. 고작 꼭 맞는 옷이 없을 뿐인데, 완벽한 데이트에 나라는 오점이 생긴 것 같아 옷장 문을 붙잡고 엉엉 울어버렸다.


데이트까지 남은 시간은 17시간. 자고 일어나서 옷집에 가 새로운 옷을 사 입을 법도 한데 쉽지 않다. 언제부터 옷을 안(못) 사게 된 걸까. 표면상으로는 간단하다. 사방에서 주어진 일들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바빴고 옷에 딱히 관심도 없었다. 보수적인 직장에 취직한 후로는 옷 입는 재미를 더 잃어버렸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한 겹 더 친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겠지. 아 – 코르셋 다시 주워 입기 싫어. 핑크 텍스도 다 지겨워. 이보다 한 겹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꾸밈 비용을 늘리는 거 어떻게 생각해? 이제 와서 살 빼고 꾸미고 싶은 마음 드는 거 위선이야?


지금 내 곁의 앙큼 보이는 흔히 말하는 그루밍족이다. 요새는 에겐남이라고도 하던데. 은근히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하고 데이트할 때면 옷을 맞춰 입고 싶어 한다. 같은 디자인에 다른 사이즈의 티셔츠를 각각 걸쳐 입는 그런 투박한 거 말고, ‘우리 제법 잘 어울리는 커플이에요’ 분위기를 은은히 풍기는 실루엣을 원하는 것 같다. 데이트 전에 뭘 입을지 물어보고, 본인이 입을 옷을 미리 사진 찍어 보내오기도 한다. 그럼 뭐해, 내 옷장은 비어있는걸. 구구절절한 이유로 옷이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옷에 관심이 없다고만 했다. 애인은 해맑게 이제부터 같이 관심을 가져보자고 했다. 아, 이 또한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를 소개받기 전에 받아 본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으니까.


‘이상형: 옷 잘 입고 스타일 좋고 개성 있으신 귀여운 분’.


개성 있으신 귀여운 분? 나잖아. 제가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첫 만남이 성사되었고, 곧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프로필에 적힌 내용은 미괄식이 아니라 두괄식임을 깨달았다. 뒤에 적힌 정보보다는 앞에 적힌 정보에 조금 더 무게가 있음을 말이다. 그는 만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입으면 더 예쁠 것 같은지 이야기했다. 꾸미지 않기에 원석 같아 앞으로가 기대된다고도 했다. 귀와 목에 걸리는 말이 늘어났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입 밖에 낸다고 이해받을 수 있을지, 오히려 나에 대해 안 좋은 편견만 강화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꾸미지 않은 내 모습도 물론 좋다고 했지만 나라는 사람을 어디까지 수용 가능한지는 다른 문제니까.


옷장 앞에서 무력하게 울며 결국 참지 못하고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울분을 쏟아낸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별로인 거냐고, 꼭 예쁜 옷을 입어야만 옆에 있을 수 있는 거냐고, 옷이 그렇게 중요하면 옷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일이지 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붙잡고 꾸밈을 강요하냐고. 나는 소비보다 저축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언제는 성실하고 수수해서 좋다면서 왜 거기서 파생되는 다른 면들은 이해해주지 않냐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순 없는 거냐고 어린애처럼 크게 소리 내어 운다. 나 몰래 생일축하편지를 적고 있었다던 애인은 어안이 벙벙한 듯 그런 거 아니라고 해명과 사과를 반복한다. 삐 -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삐 - 내 안의 엄격한 심판관이 또, 나에게, 위선이라며, 연신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묻혀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내려놓았던 꾸밈노동을 다시 해야 한다는 부담감? 신념에 충실하지 못한 죄책감?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쏟아낸 것에 대한 미안함? 완벽할 수 없으면 포기하고 싶은 강박? 뭐가 됐든 그 호루라기는 나를, 내 앞의 애인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융통성이라곤 한 톨도 없는, 자기가 믿는 것이 최선이라는 오만한 관리자. 그 관리자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내면세계에서 정해진 규칙들을 깨는 게 제일 어렵다. 틈만 나면 얼굴 위로 레드카드를 들이미는 까다로운 심판관 덕에 매번 직감적으로 자책하고 꾸짖으며 위선의 기준을 위태롭게 다듬어왔다. 확 부숴버릴까? 호기롭게 부숴봤자 단단한 조직에 구멍이 살짝 나는 정도겠지만, 그 구멍 하나로 얼마나 자유로워질지는 모르니까. 그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고 그저 나아가보고 싶다. 6년 만의 연애, 욕망에 솔직해지겠다는 선언이다. 무섭고 두렵고 작아진다. 그럼에도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숨 참고 러브 다이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