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Aug 12. 2023

나의 시집은 함께 써 내려가는 고백록

여름밤을 지나는 다섯 편의 자작시

100일 시필사 모임,『함께라서 견딜 수 있던 시간들』, 2022.


작년 이맘때 시필사 모임을 하며 적었던 몇 편의 시를 옮겨봅니다.




1.


자기소개



저는 행복한 낭만주의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 가치를 쉽게 저버리지 않는 어른이 많아졌으면 해

아직 덜 자란 마음들에 낭만을 심는 일을 합니다.


때때로 사랑 앞에 무력해집니다.

만남은 쉽지만 이별에는 취약합니다.

삶을 깊게 스친 대부분의 인연을 담고 삽니다.

막이 내리고 나서야 선명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행간을 읽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을 좋아하지만 모호한 것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봄밤과 가을아침을 좋아합니다.

서른을 달리기와 필라테스, 시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 다니카와 슌타로의 '자기소개'에서 제목과 형식을 차용했습니다.




2.


시절인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에 충성하며 살아야지

영원하지 않을 거면 빛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만

모든 빛나는 것들은 찰나의 순간이기도 하니까


난 아직도 네가 가끔 걱정돼

비가 오는데 옷은 단단히 입었는지

마음의 주름은 잘 다려가며 입고 있는지

미처 털어내지 못한 먼지 한 톨에 시선을 빼앗겨 다치진 않았는지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폭주할 때마다 고삐를 잡아주던 건 어찌 보면 늘 너였는데

나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아직도 네 말 몇 마디를 지표로 삼고 살아가

돌고 돌아 함께 걸었던 십 년 말고 나는 너에게 어떤 말로 남았을까

나도 네게 위로였던 순간이 있었겠지


유난히 추운 날에는 네 이야기를 들려주렴

우리의 시절이 끝났대도 그때 그 마음만은 곁에 남아 너를 지킬테니




3.


아침에 눈을 뜨면



달리고 달리며 잊기

사람도 만나며 잊어내기

들숨과 날숨에, 오고 가는 말소리에

안 좋은 기억들을 살살 녹여 풀어버리기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으로

시 몇 구절 읽고 발라당 드러누워

꿈속에 다 털어놓고 내일을 열기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나

새로운 날을 살기




4.


시집



수줍지만 일상적인 고백이 좋다

나에게만 허용되는 예외사항 같은 것


이를 테면

내 앞에서는 자주 솔직해지게 된다는 말

나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동네를 벗어나주는 일


스치듯 하는 말과 행동이 때로는 가장 진심일 테니

잊지 않고 한 장씩 적어 두었다가

지치는 날에 하나씩 꺼내 곱씹어야지


나의 시집은 함께 써 내려가는 고백록




5.


길 잃은 마음



  네가 따듯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그 온기가 나에게도 비춰지지 않을까 생각했어. 욕심이었던 거지.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나한테까지 다정할 필요는 없는데 말야. 며칠 아니 수백 번의 밤을 네 다정함은 어떤 모양새일까 그리며 잠들었어. 이것도 집착이라면 집착이겠지. 혹여 그 모양이 나와 맞지 않더라도 기꺼이 맞춰낼 용기도 있었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담백하게 마음을 꺼내 보일 용기는 없었지만 말야.

  이렇게 우리는 결국 투명하지 않은 어딘가에서 끝이 나겠지? 우리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삶의 한 조각에라도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면 이것조차 사치일까. 나의 몇 년을 너의 순간으로 치환하기엔 역부족일까. 그 시차 속에서 영영 길을 잃는 것은 아닐까 하여 이제는 궤도를 이탈하려 해. 부디 아프지 않게 멀어졌으면 좋겠다. 안녕 내 시절인연.





100일 시필사 모임 『함께라서 견딜 수 있던 시간들』 참여 후기



  여름의 끝자락에서 겨울의 초입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라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였던 낭독회에서 왜 자꾸 눈물이 났는지 생각해 보았어요. 시를 읽어 내려갈 때면 그 안에 담긴 날 것의 감정들이 저를 덮쳐버리더라고요. 무엇이든 꼭 손가락으로 직접 찍어 먹어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 성격 탓에, 온몸으로 부딪혀 온 시간이 많아 공감되는 일이 많았나 봅니다. 젊으면 별 것 아닌 일도 별 일이고 나이가 들면 경험에 따른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저는 그 어디쯤인가 봐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십 대처럼 갓 서른이 된 지금, 벌써부터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싶다면 욕심일까요.


  여름엔 무더워서 겨울엔 해가 짧아서 무력해지기가 쉽잖아요. 사계절이 있어 지루하지 않은 대신 잦은 변화에 능숙하게 올라타지 않으면 삶의 방향키를 놓치기가 참 쉽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견뎌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올 동절기를 기대어 견딜 여러분의 문장은 무엇인가요?


    제 문장으로는 아래의 구절을 꼽아보았습니다.

고집이라 쓰고
표백된 슬픔이라 읽습니다.
표백된 슬픔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지 않습니다.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이은규

  고집을 잘 들여다보면 상처가 함께 있기 마련이더라고요. 그렇다고 모든 표백된 슬픔이 고집은 아닌 것처럼 상처를 잘 달래고 어루만지며 이번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남아있는 고집이 아집이 되지 않도록이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