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산행 도전기 03
그토록 간절히 원하였건만, 삼라만상의 주인인 자연은 끝내 날 외면했다. 불과 며칠 전, 추암 촛대바위에서 천지신명과 태양신께 두 손 고이 모아 합장하며 간절히 빌어 보았건만 모든 게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영험하기로 소문난 영월땅 선바위산 소원바위와 부처님 진신사리께도 간청하여 보았건만 날 철저히 외면해 버린 것.
무심도 하시지. 난,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줄리의 법칙은 존재하는가
행운은 나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바람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줄리의 법칙은 없어 보였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끝내 천왕봉은 날 받아주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란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다. 특별한 연휴가 돼주리라,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 되어주리라 나름 기대했었는데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설렘으로 중무장한 채 남녘으로 가는 길에 난 난데없이 한 줄의 문자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듯한 이 느낌. 호우주의보라니. 그것도 5월 초에. 하필이면 내가 대간 마루금 출정가를 외치던 그날에.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날아온 문자를 받아 들고 고속도로 졸음쉼터에 잘 가던 차를 멈춰 세웠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워 종아리를 세차게 꼬집어 보았지만 분명 생시가 맞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대피소에 예약까지 마쳐 놓았는데. 무슨 좋은 혜안이라도 있을까, 아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지. 발만 동동거리며 애꿎은 지붕만 쳐다볼 순 없는 일. 몇 분후. 혜안이 떠올랐다. 하루 더 연기하면 되는 것. 빛의 속도로 다시 일정을 조정하고 룰루랄라 애마를 몰아간다.
머피의 법칙은 우연하게 이어지는
불운의 대명사가 되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혜안마저도 한낱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 국립공원 공단에서 발송한 의문투성이의 또다른 문자 한 통.
난. 그 메시지를 철저히 외면하고 싶었다. 받아들이기엔 나의 상심이 너무도 컸다. 입산통제가 하루 더 연장되었다 한다. 대피소 예약취소는 공단에서 일괄 처리한다 한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경남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열변을 토했으나 돌아온 건,
싸늘한 울림뿐.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모든 게 변명으로만 들려왔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면 기상청에 직접 전화해 보라는 그런 뉘앙스로만 들려온다.
난, 지금 마음이 비 뚫어져 어떤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는다. 지금의 나에겐 줄리의 법칙이란 것도 한낱 사치일 뿐이다. 기상청인지 구라청인지도 마냥 귀찮아졌다.
소싯적 국민학교 시절, 소풍날만 되면 비가 와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더니만. 학교터를 잡을 때 하필이면 승천하려는 이무기를 해코지해 해마다 안 좋은 일이 반복된다는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난 어떤 말도 그저 비아냥으로만 들려온다.
어린이날 오후. 수소문해 모처럼 친구들과 담양의 한 아담한 맛집에서 황칠백숙으로 끌어 오른 열기를 대신했다. 그리고, 우중 산책이라도 해줘야 분이 풀릴 듯하여 가까운 광주호호수공원으로 향했다.
호수는 고요하고 아무 말없다. 뭇 생명들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귀한 존재들. 물론, 나의 심리 전담 치료사이기도 하다. 우울증엔 특효약인.
간밤에 얼마나 강풍이 불어댔는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참느릅나무, 왕버들 가지들이 찢기어 데크 바닥에 나뒹굴고 상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애벌레들은 강풍과 빗방울 튕기는 소리에 놀라 어디론가 피신을 해버렸는지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비는 오다마다를 반복했고 운무도 무등산 산자락을 무심이 넘나들고 있었다. 바람도 자고 이따금씩 먹구름 사이로 조그마한 햇살이 비추어 헝클어진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기상특보는 해제되고
드디어
지리산은 날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쥐구멍에도 볕 든 날이 있다던가, 어느덧 축축하던 숲 속에도 햇볕이 뉘엿뉘엿 새어들고 있었다.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있었던 것. 지리산 천왕봉은 날 받아줄 준비가 된 것인가.
나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바람 가득 실어 경남사무소에 전화해 보았다. 내일 새벽부터 산행을 재개한다는 것. 설렘과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언제나 첫사랑의 느낌인 어머니 품속 같이 포근한 지리산을 드디어 갈 수 있게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난 순간 음유시인이라도 된 듯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다시 줄리의 법칙이 되살아 난 듯 희망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말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시려면
뼈까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지리산 시인 이원규
토요일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만 다가왔고 마음이 떨리고 저려왔다. 새벽 3시, 일찍이 짐을 꾸렸다. 옆지기님과 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둠을 갈랐다.
내 애마는 벽소령이 먼발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음정마을에 세웠고 옆지기님 차를 얻어 타고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를 향했다.
여러분의 산꾼들이 벌써부터 설렘들 가득 안고 출발 준비 중에 있었다. 옆지기님이 떠난 자리에는 떨림만 남았고 난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드디어 출발이다. 우여곡절 끝에 첫발을 내딛는 이 느낌.
별일 많은 출정식이 끝났다. 여행은 별일 많아야 한다지만 별일 하나 더 얹으려 깜빡하고 스틱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될일.
계곡물은 쉼 없이 유유히 흘러갔다. 안개비도 유난히 가던 길에 내리친다. 가랑비에 옷 젖을까 염려되어 우의까지 챙겨 입었다.
찰랑거리는 계곡물소리가 마치 내 출정식에 마중 나온 수많은 인파 같다. 철쭉꽃망울에 사랑이 걸리고 열정이란 두근자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나의 출정식에 응원한다며 짝짝짝 박수소리 우렁차다.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희망의 찬가가 울려 퍼진다.
계속해서, 멈추니까 행복이다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