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의 관여에 대하여
요즘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데이비드 이글먼 저, 김승욱 역)라는 책을 읽고 있다.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기반으로 내면의 인식 체계에 대해 다루는 내용인데 꽤 흥미롭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환경에 따라, 경험에 따라 '뇌'는 매번 또는 삽시간에 그 형태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많은 것들이 굳어지지만, 이는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더라도 특정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수 있는 근원적 움직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기억'이 자리한다. [또한 나는 그것을 체화된 기억이라 믿는다. 내 모든 잠재가능성을 이루는, 즉 세계에 관한 것이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선택한 이 환경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책에서처럼, 내가 가진 2만 개의 DNA가 무려 내 안에 자리한 약 860억 개의 뉴런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그 바탕적 구도로 딛고 있는 이 환경에 대한 것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ㅡ사회적인 나의 역할과 태도, 표출을 허락받은 감정 및 생각들, 나를 향한 수용가능한 기대치와 나의 공감 등에 따라 다듬어져 가는 나의 모습이 내가 가진 DNA에게 제공하는 최선의 환경인지를 말이다. 이번 삶에서 내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주에 대한 고민인셈이다. 젊은 혈기에 의한 것인지, 타고난 성향 때문에 이런 고민들을 하는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목마르다!
아주 오래전, 혹자는 삶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쥐어짜면서 최선을 다할 노력의 총량까지 계산되었고, 수많은 고민의 량에 의한 선택까지도 모두 계산된 정해진 삶이라 했다. 그래서 그 정해진 삶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놀라운 믿음이지만,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겠다. 각자 삶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믿음 가운데 나와 비슷한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만날 때면 크나큰 위안을 받는다. [나는 채사장(채사장 유니버스+지대넓얕)의 팬이다. 일방적 공감이겠지만!] 모두가 각자의 믿음에 따라 삶의 방식을 설정하고 수용하며 사는 것인데, 어느새부턴가 이런 사유에 상응하는 공감의 말에는 빈 울림만 가득했다. 나이를 먹으며 세세하게 뻗어버린 수억 개의 뉴런 가지들에 의해 그 간극은 영영 메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 외로움을 충족하기 위해 시선은 줄곧 책이나 유튜브로 향한다. 무작정 지금의 환경을 박차고 나갔을 때, 내가 놓일 곳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셈이다. 세계는 늘 내가 짐작할 수 없는 형태로 나를 이끌어가기에 어떤 우연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뒤따른다. 그리고 지금 이 여유는 허락된 작은 사치에 가깝다. 세계는 어느 날 어떤 사건에 의해 전 생애에 걸쳐 녹아든 삶의 믿음을 배반하기도 하며 그에 따른 황량함은 삶을 뒤바꿔놓는다. 선택할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다. 내 삶에 역동이 필요하면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것이다.
다만, 잠시 멈춰 서서 나는 더 큰 '나'에게 충실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은 이에 앞서, 지금의 내 환경에 충실히 감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옥상에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해소될 물음이기도 하지만 이 단편적인 욕구는 나와 세계의 연결감에 대한 것이므로 쉽사리 충족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제공할 경험의 틀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취미생활이라는 형태로 불리는 것인지 혹은 도전이라고 불리우는 선택에 대한 것인지, 지금 이 갈망은 어떤 류의 충족을 원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