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J Jan 10. 2024

신앙의 시작과 지금

23년 10월 1주차 회고

시작과 지금


어릴 때, 아파트 친구가 주일학교에 나를 데려갔다. 그 때 처음 배운 예수님의 사랑은 신기하고 마음에 와닿았다. 입시 때를 지나고 대학생 때 교회를 다시 가려는데 우리 학교는 유독 이단 피해를 많이 봤다. '이단이 아닌것을 누구나 있는 교회' 기준으로 삼고, 당시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때 세례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이 진심으로 믿어졌고 성인인 내가 선택한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주일 예배에만 잠깐 교회에 오는 사람을 선데이 크리스찬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부르기도 어렵다. 냉정하게, 교회에 물리적으로 성실히 출석하지 않고 공동체 소속감도 없다. 그렇다고 교회와 공동체를 영 떠나지는 않고 지낸다.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날것으로 들여다 보면, 내가 케어할 수 있는 '내 사람'의 범위가 좁다 보니, 교회 바깥에 더 신경을 쏟을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사랑하기에도 내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앙 덕분에 나는 좋은 영향력을 주는 인생을 지향한다. 가끔은 과할 정도로 착하려들거나 착하단 오해를 사는 것이 되려 문제였다. 예배를 보며 한 주를 뉘우친다. 요즘은 온라인으로도 자주 보는데 예배시간에 멍때리지 않고 딱 하나의 레슨만은 챙겨 가자는 다짐이 있다. 적어도 일년에 한 번 이웃을 위한 선행을 한다. 12월에 부랴부랴 하곤 하지만, 아무런 기대 없는 베풂이 주는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생겨난 질문


그런데 최근의 "누가 정했지?" 물음 속에서, 내 신앙 역시 관성이 아니었나 싶은 일종의 권태가 왔다사랑의 끝에서 느끼는 아픔을 농축한 심정이다. 기독교인들은 인생에 스스로 많은 고삐를 죄는데, 나 역시도 아무 고찰없이 지나치게 순진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기준들은 다시 한 번 고민하고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성인이 되었는데도 신앙을 가지기로 능동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대체로 무엇이든 결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타향에서 진심을 나눌 있는 또래필요한 청년은 외로움을 해소한다. 은퇴 마음이 헛헛한 시니어는 상실한 소속감과 일을 회복한다. 나는 딱히 결핍이 있어 교회를 찾아갔다고 스스로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일부 있었던 것 같다.


내 경우에는 고등학교를 외지로 가면서 내 준비보다 너무 빠르게 가족을 떠난 게 컸던 것 같다. 애인이나 친구 등이 아닌 가족이 줄 수 있는 unconditional 한 사랑이 덜 충족됐다. 그렇다고 원가족에게 돌아가기엔 너무 서로 달라져 딱히 그걸 원하진 않게 됐다. 그리고, 주변 사람 누구도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한 절망들이 인생에 몇 번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나를 향한 사랑과 계획을 준비한 절대자가 있다는 믿음은 큰 버팀이 됐다.


남은 올해는 마지막처럼 기도해 보려 한다. 만약 이것이 끝이 된다 하여도, 청년 시절을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세상을 밝히는 삶을 지향하게 하였고, 사람 누구도 건넬 수 없는 층위의 위로를 건네주었던, 나의 신앙에 감사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록을 사랑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