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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21. 2020

밀양,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수몰지역

결혼 연차가 어 갈수록 가정에서 남편들의 입지는 줄어들고, 아내들의 목소리는 커진다.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도 반듯한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것도 알뜰히 살림하고 저축한 돈을 잘 굴리는 아내의 덕이고, 다 자란 자녀들도 아버지보다는 늘 집안에서 고생하는 지 엄마 편이고 보니 당당한 아내 앞에 남편은 기가 어 들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밀양 박씨 집안의 딸들로부터 분리되어 자유롭고 싶어 하는 여섯 동서 모임이 있다. 내가 네 번째이다. 이번 동서 모임은 밀양 청도에서 모이기로 했다. 흑염소로 유명한 청도 깊은 골짜기에 모여 흑염소 육회, 불고기, 갈비찜을 배부르게 먹었다. 특히 갈비찜이 맛있었다. 중간중간 박씨 딸들의 고집과 거친 입을 흉보는 맛에 흑염소는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부른 배를 다스리고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 겸해서 표충사에서 가까운 밀양댐으로 갔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통제되었던 밀양댐이 열리고, 넓은 댐 주위로는 트래킹 코스가 개발되었다. 밀양댐은 밀양시, 양산시, 창녕군 등 3개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고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2001년에 완공되었다. 댐 주변은 탁 트인 전망과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밀양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동서 여섯 중에 윗 동서 두 분이 밀양출신이다. 밀양댐 바로 밑 단장면 고례리가 둘째 동서인 손서방 형님의 고향이다. 다행히 고향집은 수몰되지 않았지만 다니던 초등학교와 소싯적에 소풍 가서 놀던 농암대는 댐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고례천 상류 계곡의 농암대는 밀양출신 조선시대 성리학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말년에 머물었던 곳이기도 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첨첨이 쌓인 바위와 천 길 낭떠러지가 절경을 이루었고, 그 아래 흐르는 강물은 투명하도록 맑았단다. 그 외 사희동 등 여러 마을이 사라졌다. 밀양댐을 조성하면서 단장면 3개 마을 83가구 267명, 양산시 원동면 고전 마을 11가구 30명이 이주하였다. 이들 이주민에게는 이 곳 고향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을 것이다.  깊은 물속이라 가 볼 수는 없는 고향집이 지금은 물고기들의 아파트가 되고 놀이터가 되었다. 수몰민의 아픔을 달래는 망향비와 정자가 세워고 공원으로 꾸며진 밀양댐 전망대는 지나가는 길손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밀양출신 조선시대 성리학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말년에 머물었던 농암대
고례리 등 수몰지역에 흐르던 계곡과 옛 마을 풍경

밀양댐이 조성되기 전의 단장면 고례리는 교통이 불편한 오지 중 오지였다. 댐 건설 후에 도로가 닦이고 펜션이 들어서고 야영장이 늘어났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위해, 가을에는 단풍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특히 고례리에서 밀양댐의 수려한 풍치를 감아 돌아 양산 배내골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인들의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이 도로는 양산 에덴밸리 스키장을 거쳐 부산으로 이어진다.


둘째 형님은 결혼 후 부산에 첫 신혼집을 마련해서 살았다. 부모와 친척들은 여전히 댐 밑 고례리를 떠나지 못하고 살아갔다. 외숙모 한분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밭을 붙이기 어렵게 되자 950여 평 밭떼기를 당시 돈 900만 원에 사라고 했는데 사지 않았다. 형님은 고향 땅의 미래 변화를 읽지 못한 것이다. 결국 남에게 팔렸는데 몇 달이 지나 외지인에게 3천만 원에 팔렸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수 억 원에 팔렸다. 지금은 밀양천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그 자리에 보기 좋은 붉은 지붕 펜션이 세워져 여행객을 부르고 있다.  


둘째 동서는 그 당시 부산 사직동 시영아파트 한 채가 450만 원,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3억 원에 불과하다며 외숙모 밭을 사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경제에 밝지 못한 우리들은 늘 지난 얘기들만 하며 아쉬워하는 버릇이 있다. 이제 은퇴했거나 정년이 가까운 우리들은 노후에 무엇을 해야 살아갈 수 있을거나? 고향에 물려받은 땅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밀양댐 조성으로 마을이 사라지고 없지만, 어린 시절 수영하며 물고기 잡던 밀양천과 초등학교 때 소풍 갔던 농암대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생생히 살아 있다. 가을 소풍 가서 먹었던 찐 고구마와 소풍때 아니면 먹을 수 없었던 20원짜리 사이다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함께 걷고 있던 동서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법이다. 그 추억을 되살리며 어느 한가한 날 고향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고향이 있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실향민의 아픈 사연과 향수를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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