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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Dec 28. 2020

충북 옥천, 정지용과 육영수 생가를 찾아가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운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석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이동원과 박인수가 부른 '향수'로 만 알고 있는 이 노래의 원 작가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는 정지용 시인이다. 그는 신선한 감각과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여 실개천이 흐르고 얼룩배기 황소가 울음을 우는 농촌을 배경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우어 괴시는 모습과 어린 누이와 아내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눈앞에 그려지듯이 선명하게 표현했다. 이 노래를 듣노라면 어릴 적 옛 추억이 떠 오르며, '나 그곳에 돌아갈래' 외치며 마을이 고향을 향한다.

정지용 시인은 6.25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고, 정부는 월북작가로 분류하여 그의 모든 작품을 판금 시켰다. 1988년이 되어서야 그의 작품들이 해금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었다.


충북 옥천에 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어서 그곳에 다녀왔다.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구조로 앉아 있다. 돌담과 사립문, 초가, 우물, 장독대 등 아담한 그의 집에 들어서면 고향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노래 '향수'가 귀가에서 울리는 듯하다. 생가 옆 문학 전시실에서 정지용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지용의 시를 통해 현대시의 변화와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의 시와 산문집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가 작가를 알지 못한 체 많이 엂조리는 '호수'와 같은 시를 발견할 수 있다.     

정지용 시 '호수'
정지용의 시 '별똥'

    

정지용 시인은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한의사인 정태국과 정미하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918년 열일곱 나이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박종화, 홍사용, 정백과 사귀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3.1 운동이 반발하고 학내문제로 모인 집회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여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박종화와 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그해 12월 <서광> 창간호에 그의 유일한 단편소설 '삼인'이 발표된다. 1923년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한다.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린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킨다. 해방이 되자 이화대 교수로 옮겨가고,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경향신문의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과 사설을 맡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종사한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정지용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체 서울에 남는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지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더러는 남북 되었다고도 하고, 더러는 남북도중 동두천 인근 소요산에서 폭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정지용은 절제된 감정,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시를 빚어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시 80년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시인이라고 칭송 한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동료 시인들과 지용 이후의 시인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중요하다. 전시실내 한 모퉁이에 수집되어 있는 <정지용 탐구>, <정지용 문학의 현대성>, <정지용이 문학세계 연구>, < 정지용 시의 공간과 죽음> 등 정지용에  대한 많은 연구과 탐구들이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그의 위치를 확인해 준다.     

정지용 문학상은 1989년 정지용의 문학적 성과와 문학 역사적 위치를 기리기 위해 <시와 시학사> 출판사에서 제정한 문학상이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중견 시인들의 작품 가운데 작품성이 뛰어나고 낭송하기에 적합한 시를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박두진의 '사한체', 김광균의 '해변가의 무덤',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 정호승의 '하늘의 그물', 김지하의 '백학봉', 강은교의 '너를 사랑한다', 도종환의 '바이올린 켜는 여자', 신달자의 '국물', 김남조의 '시계' 등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쟁쟁한 시인들이 모두 정지용 문학상을 받았다.

 충남 옥천 중도시, 커다란 바나나 송이가 탐스럽게 자라는 커피집에 앉아 있다가 문득 정지용 생가가 생각났다. 차 내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간 그의 생가에서 아스라이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의 시들이 오랫동안 잊혔던 문학적 심성을 되살려 주었다. 어릴 적 꿈과 고향을 잊어버린 현대인의 비애를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정지용의 생가에서 가까운 위치에 육영수의 생가가 있어 찾아갔다.

조선시대 사대부 건축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1600년대부터 김, 송, 민 정승의 삼 정승이 살았던 곳을 1918년에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이 민 정승의 자손에게서 매입하여 살았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 사랑채, 뒤채, 행랑, 별당, 후원, 정자, 연못 등 조선시대 양반가의 건축물 모습이 드러난다. 건물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 뒤로 자리 잡은 사랑채, 그 뒤에 안채, 그 뒤에 청기와 기붕의 사당과 별당 터가 있다. 그리고 주위에는 고용인들이 살았던 부속건물이 있다.

 육영수는 1925년 11월 29일 육종관과 이경령 사이에서 1남 3년 중 셋째로 태어나 박정희 소령과 결혼을 한 1950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974년 육영수의 서거 이후 방치되었다가 1999년 완전 철거, 2011년에 복원공사를 완료하여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교동 집이라 불리던 옥천지역의 명가에 태어난 육영수는 1942년 서울 배화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옥천 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예와 미술을 가르쳤다. 부산으로 피난 온 육영수는 이종사촌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박정희 소령을 만나 1950년 12월에 대구에서 결혼했다. 1963년 11월부터 1974년 8월까지 영부인으로서 청소년의 육성과 고통받고 소외된 서민을 위로하는 사업에 힘을 쓰다가, 1974년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생가 한 곳에는 육영수와 박정희 가족의 단란했던 사진, 에피소드, 박정희가 적은 사모곡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그의 사모곡에서 아내를 잃은 슬픔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군 출신으로 독재자로 군립하면서 서슬퍼른 권력을 누리던 박정희도 한낱의 아내를 잃은 지아비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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