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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Feb 19. 2021

파타고니아, 피츠 로이 트래킹

남미 여행 29

피츠로이 산은 아르헨티나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 안데스 산맥에 있는 해발 3,375m의 높은 산이다. 찰스 다윈이 참여한 두 번째 우수아이아 인근 비글 해 항해 때 함장을 맡았던 영국의 군인이자 지리학자인 로버트 피츠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피츠로이는 아웃도어 브랜드 명으로도 유명하다.

새벽에 일어나 '연기를 뿜어내는 산'이라는 뜻의 세로 찰텐이라는 별명이 붙은 피츠로이 산이 있는 엘 찬텐 마을로 향했다. 칼라파테에서 엘 찬텐을 오고 가는 대중 버스를 이용했다. 휴게소에 내려 근처에 설치된 이정표를 통해 내가 서울에서 17,931km 떨어진 곳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버스는 계속해서 달리고, 어느 순간부터 창밖 먼 곳으로부터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피츠로이가 한 폭의 성채같이 느껴졌다. 버스는 하얀 성채를 향해 질주했다.  

전 세계의 등반가와 하이커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거리는 한산했다. 길가에서 농부가 파는 체리를 사서 먹으면서 시골의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체리는 알이 굵고 단맛이 강했다. 국내에서는 다소 가격이 비싸지만 남미나 터키와 같은 국가에서는 가격이 저렴해서 자주 사 먹는다. 망고와 체리는 해외여행 중에는 꼭 챙겨 먹는 과일이다. 맛있는 과일을 저렴하게 마음껏 먹는 것도 여행 중에 얻는 작은 행복 중 하나이다. 피츠로이는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에 속하지만 남미의 여느 국립공원과 달리 입장료가 없었다. 재한 기분이었다.

트레킹의 시작을 알리는 피츠로이 게이트를 지나 언덕을 올라가자 탁 트인 넓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라스 브엘타스 강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강과 계곡을 아래에 두고 산허리에 길게 이어진 등산길을 따라 걸었다. 시작 길은 순탄했다. 평지의 등산길이 끝나고 오름 막 길을 걷고 있노라니 카프리 호수와 피츠로이 전망대 갈림길이 나왔고, 왼쪽 길을 선택하여 카프리 호수로 향했다.

수에 비친 피츠로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명소로 이름난 카프리 호수에 도착했다. 투명하고 푸른 호수가 가슴에 피츠로이 산을 안고 있었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평화를 느끼게 했다. 맑고 쾌적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이 사람들을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끌어당기는 모양이다. 등산객들이 자리를 펴고 누워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었다. 나도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호수와 산들 틈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어 볼꺼나?

몸은 카프리 호수에 잠겨 푸른색으로 물들어 가는데, 마음은 피츠로이 정상을 향했다. 다시 못 올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카프리 호수를 돌아 피츠로이에 이르는 코스도 비교적 완만했다. 작은 계곡엔 푸른 물이 휘감아 돌고, 습지 위에 놓은 낮은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키 작은 관목 사이를 지나고 수백 년 된 고목이 누워있는 숲길을 걸었다. 가끔씩 눈 덮인 바위산이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면 멀리서 피츠로이의 수려한 풍광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가끔씩 만나는 이정표가 반가웠다. 피츠로이까지 몇 km 남았는지를 표시해 주는 이정표가 동반자같이 느껴졌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때마다 발걸음에 활력이 붙었다. 땀을 식히려고 작은 개울에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담그면 만년설의 찬 기운이 온몸에 전해졌다. 마실 물이 다 떨어져 허리를 굽혀 플라스틱 병에 계곡물을 담았다. 수백 년 된 눈이 녹아 흐르는 차가운 옥빛 계곡물을 음료로 마시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남은 깔딱 고개 1km가 고비였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고, 이미 오랜 트래킹으로 지쳐버린 발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몇 번이나 쉬면서 걷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마지막 고갯길을 넘자 트레스 호수와 피츠로이가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옥빛 트래스 호수는 푸른 하늘빛과 대조를 이루었다.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장엄한 피츠로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 있었다. 세계 5대 아름다운 봉우리 중 하나로 일컫는 산과 마주 서서, 이 곳에 올 수 있는 기회와 피츠로이의 맨살을 드러내 주어 준 것에 감사했다.

엘 찰텐으로 내려오는 길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남미 여행 전에 사서 신은 트래킹 슈즈가 말썽을 일으켰다. 산을 오를 때 신발 앞이 입을 벌릴 기미를 보이더니만, 하산할 때는 아예 앞부분 전체가 벌어지고 말았다. 걸을 때마다 신발창 앞부분이 입을 크게 벌려 뒤축과 맞닿아 찰싹거리며 손뼉 치는 소리를 냈다. 땅을 디딜 때는 신발창이 접쳐 걸음걸이를 방해했다. 절름발이처럼 걸었다. 이 성가심이 짜정을 동반했다. 도대체 신발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 불편함을 주는 거냐? 아름다운 산행을 망치는 이 신발의 제조사를 어떻게 복수하지... 온갖 망상이 다 들었다. 모든 것이 좋은 법이란 없는 것인데, 편함과 불편한 속에서 편하고 좋은 것들을 즐길 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난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

토로스 호수와 연결된 브엘타스 강이 나타났다. 이제 거의 다 내려왔다. 마지막 1km 외에는 전반적으로 완만한 코스를 아침에 출발하여 늦은 오후까지 내려온 23km, 8시간의 트래킹. 후반에는 발바닥이 아프고 고관절이 저려 왔다. 눈도 침침해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피츠로이 만년설이 녹아 고인 호수처럼 에메랄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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