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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Jan 04. 2022

기억의 장면을 차마 꺼내 들지 못하고

수채화 그리기

언젠가 고향 함창을 방문해서

하얀 명주실 길이 연결해주는 이 고장의 명물과 볼거리를 둘러본 적이 있다.


누에고치가 뽑아낸 명주실 같이 길게 이어진 길을 걷다가

어릴 적에 엄마를 따라가서 찐빵과 가락우동을 얻어먹던 시장을 지나고

방과 후 묘 등에 올라가 미끄럼을 탔던 고령가야 왕릉을 만나고

빨갛게 익은 감 홍시를 따먹기 위해 장대를 쳐들고 발돋움했던 옛 친구의 집을 스쳐갔다.


집 뒤뜰 좁은 땅에 모아 둔 타이어 속을 채운 흙더미에 심은 배추가 자라고

파란 지붕 집 툇마루 위에는 깎아놓은 감이 가을빛을 받아 곶감으로 탈바꿈을 하고

백발의 할머니가 창문을 열고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바느질을 하고 계셨고    

아스라이 남아있는 추억이 담긴 언덕 위 옛집은 쇠잔하게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 집은 낡은 함석이 담벼락을 대신하고

나이테 물결무늬가 선명한 송판을 겻대어 만든 낡은 대문이

외부자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 완성.


동무들과 숨바꼭질하던 어릴 적엔

그 대문을 밀고 들어가 숨을 곳을 찾곤 했는데

지금은 차마 그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담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 문을 열면

내 어릴 적 추억들이 재잘거리며 나를 맞이 할 텐데

난 그 기억을 차마 소환해 내지 않았다.


추억을 그냥 추억으로 남김으로써

추억은 내 기억 속에서 더 웅웅 거리며 커져갈 것이고

보석처럼 아꼈다가 훗날 육신이 쇠잔해져 쓸쓸하다고 느껴질 때

마침내 꺼내어 옛 기억으로 행복해 지길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는

소환하지 못한 추억들이 밝은 빛이 되어

낡은 대문의 송판 틈 사이를 뚫고

내 앞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 이 그림은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시간을 충분히 잡고 디테일하게 그려 나갔다.  송판의 나무 나이테와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을 하나하나 그렸다. 그림자와 대비하여 대문 사이로 비껴 들어오는 햇빛을 강조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림의 마무리를 위해 주저 없이 사인을 했다. 지난번 그림에서는 폼나는 사인을 찾아내지 못해서 거의 한 달간 사인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지만, 마침내 그림을 헤치지 않는 사인이라면 어떤 것도 괜찮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번 그림에는 낙엽들 사이에 티 나지 않은 색상으로 사인을 하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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