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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27. 2022

그곳에는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장독대에는 무엇이 보관되어 있을까?

8월 말의 햇살은 따갑다. 높아지고 청량해진 파란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점심시간에 사무실을 나서면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게 된다. 계절을 잊은 도심지에 살고 있는 나는 여성들의 옷차림을 통해 여름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고향에 들러 어머니를 모시고 차를 몰아 도착한 문경 누이집에서 빨간 사과가 가을이 왔음을 알려 주었다. 지난번 왔을 때 손톱만 했던 사과가 크고 탐스럽게 영글고 있었다.


이 절기에 농부는 바쁜 손을 움직여 이른 추석을 맞이 할 준비를 한다. 사과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반짝이를 사과나무 아래에 펼쳐 놓고 햇살이 골고루 사과에 비추게 한다. 햇볕은 사과의 빛깔을 곱게 물들이고 당도를 높인다.  보기에 좋은 사과가 맛도 좋다는 얘기가 맞고, 보기 좋은 사과가 농부들의 주머니를 두툼하게 만든다. 9월 초로 앞당겨진 이번 추석에 맞추어 탐스런 사과를 낼 수 있을지가 농부들의 최대 관심사이다. 빛깔이 곱지 않은 사과를 추석 전에 출고할 것인지, 아니면 추석이 지나더라도 사과를 잘 익혀 내보낼지 선택해야 한다. 농부들에게 추석은 대목에 해당한다. 사과 가격은 추석 전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명절 선물용 사과는 비싼 값에 팔리지만, 추석이 지나면 집집마다 먹을 것이 많아져 사과 판매가 저조해져 낮은 가격으로 출고할 수밖에 없다. 농부는 어떤 선택을  것인가?


9월에 수확하는 빨간 홍로, 11월 부사와 노란 봉투를 뒤집어 쓰고 있는 배가 한자리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다.


농부는 또 다른 선택을  하여야 한다. 품종에 따라 사과의 수확시기가 다르다. 여름 사과로 불리는 푸른 아오리는 8월에 수확하고, 추석 선물용으로 적당한 홍로는 9월에 딴다. 문경에서 개발했다고 감홍은 10월에 수확하고, 사과의 대명사로 일컫는 부사는 11월 초 서리가 내리기 전에 딴다. 맛과 가격이 서로 다르지만, 많은 농부들이 저장기간이 긴 부사를 선호한다. 부사는 냉장창고에 보관하여 높은 가격으로 연중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단한 과수원 일을 11월까지 해야 하는 고역을 감안할 때, 9월에 수확하는 홍로를 가꾸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두 달 일찍 힘든 과수원 일에서 벗어나 쉴 수 있고, 가을철 다른 농작물을 돌볼 수도 있다. 늦은 가을에 사과수확과 송이버섯 채집이 중복되어 힘들어하는 누이 내외는 일부 부사 나무를 홍로로 교체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다.


그곳엔 가을이 영글어 가고 있다. 대추가 굵어지고 청포도가 익어가고 있다. 이육사의 칠월 청포도가 고지대에 해당하는 문경에서는 8월에 익고 있다. 칠월의 강렬한 햇빛이 포도를 숙성시켜 당도를 높인다고 하지만, 문경에서의 청포도는 봉투 안에서 당도의 농도를 높이고 있다.


부지런한 꿀벌은 이른 아침부터 호박꽃을 옮겨 다니며 꿀을 모으고 있다. 누이의 정원에는 하얀 박꽃도 피어 있는데, 호박꽃 꿀과 박꽃의 꿀  맛은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누이의 정원에 피어 있는 처음 보는 노란 꽃은 어찌 키가 저리도 크고 열매가 굵을까? 인터넷에 살펴보니 1년생인 금화규는 황금 해바라기 또는  야생부용이라고도 불리는 약재식물이라고 한다. 말려 차로 마시면 콜라겐이 많아 미용에도 좋다고 하니 꽃잎을 따서 말려보라고 할까?


어릴 적 부뚜막에서 어머니 옆에 앉아 입으로 받아 먹던  호박잎은 내가 좋아하는 식품이다. 여름철 나는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호박잎을 찾는다. 맛있게 끓인 된장찌개 한 숟가락에 고추장  조금을 찍어 놓고 싸 먹는 찐 호박잎의 맛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젓가락을 대지도 않는다. 아련한 추억의 맛을 아이들이 알 수는 없겠지.


이른 아침 나가보니 이방인이 세워  놓은 차를 환영하는 듯 호박순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혹시 호박이 도시의 냄새를 맡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낯선 냄새에 코를 내밀고 킁킁대고 있는 것일까?


자식들이 학업과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난 시골은 나이 든 부모들만 남았다. 고향을 떠나 살 수없다는 노인네들이 남아 농사를 짓고, 손수 수확한 곡식과 푸성귀를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보낸다. 농번기에 부모를 돕기 위해 찾아오는 자식들이 반갑고 고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식들의 방문 횟수도 줄어들고, 특히 명절 때는 전화 한 통만 하고 오지 않는 자식들이 섭섭해진다. 전화도 한 통 없는 자식이 이번 명절에는 행여 찾아올까  부모는 집 앞 등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다가 앉은자리에서 잠이 든다.

시간이 흘러 시골집을 지키던 부모도 세상을 떠내고,  돌보지 않는 사랑채는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다. 집을 감싸고도는 돌담 위에는 호박 능쿨이 무성하고, 탐스러운 애호박은 찾아주는 이가 없어 누렇게 익어갈 시간만 헤아리고 있다. 여전히 장독대는 어머니의 손길이 남아 반짝인다. 장독 속이 궁금하다. 오래된 된장이나 고추장? 혹 소금을 담고 그 속에 참기름 한 병을 숨겨 놓았을까? 아니면 손주들이 오면 꺼내  줄 사탕과 곶감 몇 개를 감추어 둔 것은 아닐까? 집주인은 이 장독에 무엇을 보관하였을까?


나는 아침을 먹고 과수원으로 나가  빨간 홍로 사과를 따면서 익어가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등을 같이 나누고 있는 쌍둥이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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