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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Dec 15. 2022

비원, 창덕궁 후원에 가다

어렸을 때 서울 모처에 비원이 있다는

비밀 정원이라서 출입이 통제되었다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곳은 어디이며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더군다나 비밀정원이라는 대중가요가 만들어지고

Screte Garden이라는 영화와 드라마가 히트를 치면서

비원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져갔다.


시간이 흘러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의 5대 궁궐 중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피로 뒤덮은 법궁인 경복궁을 기피해서

별도로 지은 창덕궁의 후원을 비원이라고 일컫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전 예약에 의해 제한적으로 후원을 공개한다는 정보를 얻어

서울을 방문하는 날을 맞추어 예약을 했다.


창덕궁은 정치와 생활을 공간을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선의 대표적 궁궐로서

조선의 역대 왕들이 살았고

조선 후기에는 실질적 법궁의 역할을 한 곳이다.

  * 법궁이란 왕이 거처하는 공식적인 궁궐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가리킨다.


중용에서 가져온 '임금의 큰 덕으로 백성을 돈독히 교화한다'라는 뜻을 가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찾아간 날은 다소 쌀쌀했다.

일직선으로 된 다른 궁궐의 건물 배치와 달리

돈화문을 통과한 후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교를 건너 인정문을 지나자

왕의 즉위식이나 사신 접견,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나타났다.

 * 인정은 어진 정치를 뜻한다.


인정전 내에는 왕권의 권위를 나타내는 어좌와 일월오봉도가 놓여있다. 달과 태양, 다섯 개의 산, 소나무는 영원히 존재하는 왕권을 상징한다.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는 편전인 선정전

왕의 생활공간인 희정당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성정각 등 잘 지어진 수려한 공간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낙선재가 가장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헌종 13년, 1847년에 지은 전각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족  이방자와 덕혜옹주가 살았던 낙선재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고

마지막 황후인 순종효 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다가 숨졌으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서 해방 후에도 이승만의 반대로 일본에 머물러야 했던 고종의 아들,

의민 태자 의친왕이 1963년이 되어서야 부인 이방자와 귀국해서 거처하다가 생을 마감했고

역시 볼모로 끌려갔던 덕혜옹주가 1962년에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에 사망한

비련의 장소인 낙성재를 돌아볼 때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창덕궁 후원은 북한산 을봉자락 4개 골짜기의

동산과 숲을 그대로 살려서 수로를 만들고 물길을 끌어들여 정원을 만들고

적당한 위치에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과 민가 형태의 연경당을 배치하였다.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부용정의 연못과 주합루
연꽃을 뜻하는 부용정

낙선재를 지나 북쪽의 낮은 언덕을 지나면

네모난 연못에 두 다리를 담고 있는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은 부용정과

북쪽 언덕에는 정조 때 지었다는 주합루가 자리 잡고 있다

네모난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음양오행의 사상을 담고 있는 부용지와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항상 백성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 어수문을 거쳐 주합루로 이어지는 풍치는

여름 한낮의 더위를 식히고 가을철 단풍을 즐기는 휴식의 공간이며

사색의 공간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니 완벽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인조 14년, 1636년에 지어진 청의정


후원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옥류천에는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청의정이 있다.

정자 앞 조그마한 논에 벼를 심고, 수확 후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해서

백성들의 고단함을 몸소 체험하고,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는

조선 왕들의 의진 마음과 지도자의 모범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 보기에 좋았다.

 * 의는 '맑은 물결'이라는 뜻으로 옥류천 일대의 은 물을 따서 이름 지은 듯하다.


인조 22년, 1644년에 지어진 존덕정


후원에서 가장 화려하고 규모가 큰 존덕정은 육각형 이중 지붕을 이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자 안에는 6개의 두꺼운 기둥을 두고 바깥쪽에는 18개의 얇은 기둥을 두었고

천장에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청룡과 황룡이 희롱하듯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 인조는 '숲 바람이 번잡한 마음을 씻어주네'라는 어필을 써서 걸었다고 한다.

 * 존덕은 '덕을 높이다'라는 뜻으로 '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정치를 하라'는 마음을 담았다.


건물에는 정, 루, 당 등의 이름을  붙이는데 '높은 터에 지은 정자'라는 뜻의 사를 붙은 정자는 궁궐 전각 중에 폄우사가 유일하다.
헌종 때 지은 동궐지에 그려져 있는 폄우사, 존덕정, 청의정


 

존덕정 서쪽에는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자주 찾아와 공부하고 휴식을 취했다는

폄우사가 세워져 있는데, 폄우는 '어리석음에 돌침을 놓아 깨우치게 한다'는 뜻으로

'왕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우쳐 마음을 다잡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본인에게도 스스로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원서동(창덕궁 후원의 서쪽 동네)에 위치한 요금문에서 역사적 애환이 많이 서려 있다.


창덕궁을 두른 담장을 출입할 수 있는 서쪽 5개 문 중에서 요금문은

궁궐을 돌아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긷고 간택된 처자들이 궐내에 들어오거나

궁인들이나 궁궐을 출입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문으로

숙종 때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의해 폐비가 되어 이 문을 통해 궁궐을 나가고

다시 왕비 자리를 되찾아 이 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와서

요금문 안쪽 경복당에 머물게 되고 장희빈을 대조전에서 끌어내리는 역사가 담긴 문이다.


천년기념물 471호로 지정된 뽕나무 보호수


있는 그대로의 계곡과 숲, 나무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후원에는

정자 외에도 눈에 띄는 여러 사물과 이야기가 남아 있다.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옆에는 수령 400년 된 수형이 아름답고 단정한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농본 사회이었던 조선은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을 중요시하여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일반인에게 양잠을 권했다고 한다.

이 뽕나무는 천년기념물로 선정 되어 양잠을 귀중한 산업으로 여긴 조선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천년기념물 194호로 선정된 향나무 보호수로 수령이 750년이 넘는다.


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쓰이고 있다.

창덕궁 향나무는 수령 750살로 오랜 세월 동안 왕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온 나무로

2010년 태풍의 피해로 일부는 손상이 되었지만 둘레 5.9m로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 향나무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수형이 용이 하늘을 오르는 형상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을 가졌던 비밀스러운 비원, 창덕궁 후원을 마침내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베르사이유 궁전과 정원, 스페인 알람브라 여름궁전의 정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인 쉔부른과 벨베더러 궁정과 정원,

러시아 표트르 황제의 여름궁전과 정원 등 내가 가본 유럽식 정원들은     

넓은 평지 위에 대칭형 길을 내고 기학적 모형과 원근법을 이용하여 공간을 배치하고

규칙적 질서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원들이었다.

나무와 꽃을 가꾸는 취미의 공간, 예술의 공간이라 느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정원은

자연을 훼손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생긴 그대로 이용하고

주변의 경관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작은 집이나 정자를 배치하고

인근의 계곡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수로를 내고 물길이 머무는 정원을 만들어

자연 속에 섞여 풍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물이 하나가 되게 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으로서 휴식과 사색, 수련의 공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수많은 전각과 후원의 정자들에 담긴 역사적 사건과 사연,

현판과 편액의 의미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시사점을 생각하면

창덕궁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어야 하지만, 창덕궁 후원 해설은 1시간 반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에 대해 간략하게 공부하고 난 후

후원 해설가의 꽁무니를 바싹 따라다니면서 소개하는 역사와 설명하는 내용을 귀담아듣고

집으로 돌아와 메모해 둔 것 중에 마음에 꽂히는 것들을 인터넷을 찾아가면서

다시 음미하는 것이 제대로 창덕궁 후원을 답사 방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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