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는 '끈질긴 물고기'라는 뜻을 가진 관상어이다. 태국에서 투기용으로 싸움을 붙이는 샴 싸움 고기로 개량된 열대어이다. 이 싸움 고기는 자기의 영역에 들어오는 물고기에게 지느러미를 펼쳐 위협한다. 상대방이 물러가지 않으면 직접 공격도 하는 사나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크기는 5cm에 불과하지만 지느러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초보자가 키우기엔 최고의 관상어이다. 공기호흡이 가능한 라비린스라는 보조 호흡기관을 가지고 있어 수면 위의 공기로 호흡할 수 있다. 그래서 작은 용기에서 산소 공급 없이도 키울 수 있다.
처음 베타를 만난 것은 막내 해찬이가 군 입대한 후에 아들 방에 들어갔을 때이다. 물관리가 되지 않아 뿌옇게 불투명해진 물이 담긴 작은 물통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혼탁한 물속에서 빨간 베타 한 마리가 화려한 지느러미를 펼치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아들이 없으니 내가 관리해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식탁으로 옮겨 놓고 먹이를 주고 가끔씩 물을 갈아 주곤 했다. 지름 15cm 원통형 물통을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가끔 주둥이를 물밖으로 내놓았다. 뻐꿈뻐꿈 숨을 쉬면서 공기방울을 만들기도 했다. 몇 달을 그렇게 잘 살았다. 식사할 때마다 레드 베타를 내려다보았다. 동료도 없이 오직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자유로움을 부럽기도 하고 외로워도 보였다. 좁은 공간을 전혀 답답해하지 않은 듯했다. 베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면서, 예전에 들린 모스크바 성모 성천 기념성당 천장에 그려진 예수님이 생각났다. 성당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모든 행동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선악을 가려 행동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새기게 되었다.
골드 베타. 가끔 손거울을 어항 옆에 둔다. 싸움 본능을 일깨워 지느러미를 펼쳐 위협하게 함으로써 지느러미가 말려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어느 날 작고 단조로운 어항에 싫증이 난 아내가 조약돌과 하얀 산호 조각을 넣어 주었다. 몇 주가 지난 후 베타가 돌 사이에 머리를 박고 움직임이 적어졌다. 먹이를 먹지도 않았다. 시름시름 앓았다.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회복되기만 기다렸다. 소생할 기력이 없어 보였다. 결국 죽었다. 뿌엿게 흐려진 물을 아내가 수돗물로 갈아 준 것이 원인이다. 물속에 남아 있는 잔여 화학물을 베타가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물을 한 번도 갈아 주지 않던 아내가 안 하던 짓을 해서 잘 살고 있는 베타를 죽였다. 한 며칠 마음이 우울해졌다. 한 생명이 꺼졌다. 식탁에서 시야를 둘 곳을 잃어버렸다.
다시 베타 한 마리를 샀다. 이번엔 블루 베타다. 둥근 어항도 마련했다.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주기 전에 포크로 어항을 두세 번 치면서 주인이 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어디 주인이랴? 도리어 제 때 먹이를 공급하는 하인이라고 베타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 마리는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고 크라운 베타 한 마리를 더 사고 별도의 어항도 마련했다. 베타는 잘도 살아가는데 한 마리는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징표인지 모르겠다. 두 마리 베타는 별도의 공간에서 잘도 살아갔다. 내가 다가가면 두 마리 모두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제 때 하인이 먹이를 가져왔다고 즐거워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갈라진 둥근 꼬리가 아름다운 크라운 베타가 어항 밑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왜지? 원인이 뭐지? 뭐가 문제라 크라운 베타가 시름시름 앓고 있지? 살려낼 방법이 없어 또 회복되길 기다리며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 며칠 버틸까? 우려와 걱정... 생각과 달리 어항 밑에서 떠올라 물밖으로 주둥이를 내놓고 호흡을 하며 2주간을 버텨 주었다. 적지만 먹이도 조금씩 먹었다. 낯선 환경이 더 큰 위협을 줄 것 같아서 물을 바꿔 주는 것도 금지했다. 수돗물을 받아 며칠 실내에 두었다가 어항 물을 바꿔 주는데 행여 어떻게 될까 조심했다. E 마트에 들려 다른 베타를 살펴보기도 했다. 상실감을 구매로 대체하겠다는 인간적 욕심으로 크라운 베타를 떠내 보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과감히 어항 물을 교체하기로 했다. 정든 베타가 죽던 살던 빨리 결정되길 바랬다. 죽으면 더 화려한 베타를 사리라. 그런데 물을 바꿔주자 베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항 밑에 배를 깔고 누웠던 베타가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힘을 내서 활발히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완전히 소생한 것이다. 지난번 갈아 준 물에 이상이 있었든지 아가미 호흡이 잘 안돼서 빌빌거리다가 이번에 갈아 준 물이 소생할 수 있는 산소 공급이 원활한 모양이다. 제 물을 만나 신나게 헤엄친다. 왕성한 식욕을 보여 먹이도 자주 준다. 활발한 헤엄과 활짝 핀 크라운 베타의 뒷지느러미를 보는 내 마음도 환하게 밝아졌다.
관리 소홀로 처음의 화려했던 색채를 잃어가고 지느러미 끝이 말려 들어가지만, 다가가면 아는 체한다. 하인이 왔군 하고.
제 때 물 주고 햇빛도 쬐여 주어야 하는 난초 키우기에 몸과 마음이 얽매여 버린 법정스님은 자유로와지기 위해 기르던 난초를 남에게 주어 버렸다고 했다. 구속이 싫다고 하셨다.
베타는 2주일에 한번 물갈아 주고 한 사흘 먹이를 주지 않아도 멀쩡히 잘 살아가는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