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 측면에서 보면 요즘 유아들은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만 4세 유아들과 ‘나’ 자로 시작하는 말놀이(‘동두음 말놀이’)를 하는데 한 유아가 ‘나마스테’를 말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나마스테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전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인도에 관해 알고 있던 단어라곤 '카레' 정도였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타지마할'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그 전집을 여러 번 읽었으니까 타지마할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실 그것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들었던 단어들을 이젠 만 4세 유아도 알고 있더군요. 나마스테뿐만 아닙니다. “소환하다.” “거래하다.”와 같은 동사도, 군사용어에 속할 것 같은 “좌표를 찍다.” “화력을 보태다.”와 같은 문장도 알고 있더군요. 요즈음 유아들의 어휘력, 정말 대단합니다. ‘가’ 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해보라면 한 50개 정도 말하니까 정말로 대단한 거죠!
그런데 그렇게 감탄만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나마스테는 좋은데, ‘화력’은? 그 단어들은 아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또는 다른 사람이 게임하는 걸 보면서 알게 된 단어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교육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교육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정작 알아야 하는 단어는 전혀 모르고, 게임에서 쓰는 단어만 너무 많이 안다면 문제이지 않을까요? 어휘력에서도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아는 어휘가 많으면 좋은 것 아닐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휘 수말고도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휘력은, 단순히 한 단어에 담긴 한 가지 뜻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어서 짜증 나신 적 있으시죠? 단어장에는 한 단어에 한 가지 뜻만 일대일 방식으로 적어서 외웠는데, 외국어 선생님은 한 단어에 담긴 다양한 뜻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시험에는 내가 외운 뜻이 아니라 꼭 외우지 않은 다른 뜻을 묻는 문제가 나와서 화난 적 있으시죠! 그래서 한 단어에 한 가지 뜻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진 않으셨나요?
그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담겨있음은 우리 생각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입니다. 한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같은 단어라도 맥락이 다르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 문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피다’가 ‘꽃’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얼굴’과 만나면 환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어떤 단어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단어의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건, 한 단어에 다양한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애석합니다. “얼굴이 피다.”는 문장을 얼굴에서 피가 난 걸로 이해하거나,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고 말하니까 “여름인데 왜 서리가 내리지?”라고 반문한다면, 슬프기까지 합니다. (유아가 아니라 중·고등학생 이야기입니다.) (EBS 다큐 프라임, '다시, 학교' 10부).
EBS 다큐 프라임, '다시, 학교'의 한 장면
어휘를 많이 알면 좋지 않을까요?
당연합니다. 어휘력이 표현력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어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유아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영어단어 500번 쓰기’와 같은 식으로 어휘 공부를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유아들에게 그렇게 어휘 공부를 시키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하지만 단어 카드를 활용한 학습지 형태의 단어공부는, 기본적으로 ‘영어단어 500번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대일 방식으로 단어의 뜻을 가르친다면, 단어와 단어가 만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