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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Dec 30. 2023

단어 선별 기준: 해당 단어가 삶의 일부인가?

말놀이로 시작해보세요 (4)

아는 어휘는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늘어났지만, 초등학교 교사들은 아이들의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학교 교육에서 필요로 하는, 또는 학교 교육에서 필수로 정해놓은 단어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는 단어가 권장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보기에 유익한 단어는 아닌 셈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떤 단어를 만나면 좋을까?’ 1960년대의 애쉬톤-워너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용수’, ‘배수’, ‘여수’ 등의 단어를 농민의 문맹 퇴치 교육에 활용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환’, ‘거래’, ‘좌표’, ‘화력’ 등의 단어를 유아 말놀이에서 활용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아이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인지 여부만 고려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적절한 단어인지까지 고려한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그런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실생활을 통해서 배웠거나 일상생활에 유용한 단어는 아닙니다.  

   

이 점이 어휘와 관련된 첫 번째 딜레마입니다.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애쉬톤-워너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단어라면 그 어떤 단어라도 받아줬습니다. (애쉬톤-워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생각의 실마리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애쉬톤-워너는 특정 단어가 아이들 자신의 일부인지 아닌지만을 고려했습니다. 애쉬톤-워너가 만났던 1960년대 마오리족 아이들의 생활은 열악했습니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고른 단어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단어가 아닌 경우도 많았습니다.   


Sylvia Ashton-Warner의 'Teacher' 영문판 표지

   

한 마오리족 아이, 세븐은 ‘폭탄’을 첫 단어로 정했습니다(Ashton-Warner, 1963: 32쪽). 폭력적인 단어라서, 애쉬톤-워너가 당황했을까요? 아닙니다. ‘폭탄’이라고 적어줬습니다. 랑기(Rangi)라는 아이는, 경찰이 자기를 소방차에 태워 감옥으로 데려가 정육점 칼로 목을 베어 죽이고 자기 시체를 벽에 걸어둘 거라고 말했습니다(38쪽). 어떤가요? 만 5세 아이 이야기라고 보기엔 너무 살벌하지 않나요! 그래도 애쉬톤-워너는 모두 받아줬습니다. 학교가 싫다거나, 자기 집이 불타 없어진다거나 동네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49쪽)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이 말한 내용을 모두 수용했습니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폭력적인 말이든 평화적인 말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31쪽). 그 모든 단어와 문장은 그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애쉬톤-워너의 유일한 단어 선별 기준은, 아이에게 강렬한 의미가 있는지, 아이들의 역동적인 삶의 일부인 지였습니다(Ashton-Warner, 1963: 32쪽). 애쉬톤-워너는, 그 기준에 맞는 단어를 유기적(organic) 단어라고 불렀습니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아이들에게 강렬한 의미가 있고 그들 존재의 일부인 단어이기 때문에, 무기적(inorganic) 단어가 아니라 유기적 단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도 놀랄 게 없습니다. 사실 요즘엔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아이에게 의미 있는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활용하여 또다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선생님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프레이리나 애쉬톤-워너의 시도가 매우 특별했고 그분들의 생각이 획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특별한 시도였고 획기적인 생각이었다는 점, 그 점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그분들이 마주했을 고민과 함께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리는 단지 브라질 농민의 문맹퇴치에만 힘쓰지 않았습니다. 프레이리는 억압과 착취를 견뎌내야만 했던 브라질 농민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애쉬톤-워너는 장차 사회적 실패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마오리족 아이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의 획기적인 시도는, 가르치는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 그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단지 그러한 헌신적인 마음을 실천한 결과였을 뿐이었습니다. 




Ashton-Warner, S.(1963). Teacher. NY: Simon & Schuster,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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