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연철 Dec 06. 2023

한글 가르쳐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

한글 공부, 절대로 시키지 마세요 (6)

만 5세 아이, 크리스틴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침대에 앉아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크리스틴은 “우리에게 글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라고 말했다. 크리스틴의 아빠는 이 특별한 감사의 표현에 조금 놀라서 왜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글자가 없다면 소리도 없었을 테니까요.”하고 크리스티는 설명했다. “만일 소리가 없다면 말도 없을 거예요. 만일 말이 없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 없어요. (...)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면 세상도 없을 거예요.” (Matthews, 2013: 26쪽)

    

“글자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는 생각. 정말 기특하지 않나요? 크리스틴은 글자 읽는 법을 스스로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기 싫어 몸부림을 치며 글자 공부를 하는 아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것 같습니다.      


글자 익히는 속도로만 본다면, 크리스틴은 학습지로 글자 공부를 한 아이들보다 빠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적 표현과 이해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야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강제로 하고 있는데, 겉모습만 ‘스스로’로 포장한 가짜 자발성이 아니라 진짜로 자발적이어야,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한글 공부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스스로’ 한글 공부를 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선생님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2023년 3월부터 유치원 선생님과 함께 학습동아리를 꾸리고 ‘이야기 만들기’라는 주제로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형식적인’ 한글 공부를 하지 않아도(아니, 하지 않아야), 아이들이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으며, 언어의 마술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만들기'를 하면, 더딜 수는 있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한글을 ‘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박수미 선생님(만 4세 반) 사례입니다.     


지현이는, 3월에는 자기 이름 쓰는 것조차 거부했던 유아였다. 그런데 말놀이를 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서(5월 23일),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내 이름 ‘현’자가 헷갈려요.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했다. 말놀이를 하더니 글자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거다. 그때, 나 대신 대신 다른 친구가 나섰다. 수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아! 내가 알려줄게!”      


아이가 글자 쓰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글자 공부에 지쳤을 수도 있고, 잘 쓰는 아이와 비교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지현이는 자기 이름을 쓰는 것조차 거부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말놀이를 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글자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의 말놀이를 통해 언어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글자를 아는 친구가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합니다.    

  

홍윤슬(박수미 선생님반)의 쓰기 예시(왼쪽은 5월 4일, 오른쪽은 7월 17일)


다음은 이지은 선생님(만 5세 반) 사례입니다.

    

진수는 평소 종이접기, 블록 놀이만 좋아하고 글자 쓰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아이다. 그런데 매일 ‘초성 알아맞히기 게임’에 참여하더니 초성 퀴즈 놀이에 푹 빠졌다. 자유 놀이 시간, 점심시간, 대집단 활동 시간을 가리지 않고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면 화이트보드에 초성을 적어 퀴즈를 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이 정답을 맞히면, 나머지 자음과 모음을 적어 보여주곤 했다.     


진수의 초성 퀴즈 사랑은, ‘단어’에서 시작했지만 ‘짧은 문장’ 초성 퀴즈로 이어졌고, 이어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와 같이 긴 문장 초성 퀴즈로 계속되었습니다. ‘글자에 대해 관심 가지기’에 머물지 않고 글자 쓰기를 익히는 수준으로 발전한 경우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슬기 선생님(만 4세 반) 사례입니다. 상담 시간에 학부모들이 했던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선생님, 요즘 진경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읽고 쓰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읽고 쓰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 제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 만들기’, 어떤 건가요? 집에서도 해주고 싶은데 그걸 하면 아이가 한글 금방 깨우칠 수 있나요?”

    

이야기 만들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한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한글 공부를 시작한 예는 매우 많습니다. 이야기 만들기를 하면서 ‘읽는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읽기와 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학부모들의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형식적인’ 한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매우 효과적으로 한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방법을 가정에서도 적용하고 싶어 하게 된 것입니다.




Matthews, G. (2013). 아동기의 철학: 타고난 철학자인 어린이들에 대해 생각하다. (남기창 역). 서울: 필로소픽.     


제 글에 등장하는 선생님의 이름은 실명이고 아이들 이름은 가명입니다. (물론 선생님들의 동의를 받았습니다.)

이전 05화 춤추고 싶지 않은 고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