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지를 사용한 시각적 변별력 훈련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제적이지만 않다면 정신건강에 나쁠 건 없습니다.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시각적 변별력은 아니고, 숨은 그림 찾기의 일종이긴 하지만) ‘월리를 찾아라’ 같은 것도 재미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세계지도에서 도시 찾기 놀이를 했는데 참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억지로’ 훈련하는 것에 반대할 뿐입니다.
시각적 변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표준철자에 가까운 창안적 철자를 쓸 줄 아는 아이들을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다가 엔데의 소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소설 ‘끝없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시작합니다. 상점 안에서 유리창을 바라본 겁니다.
Ende, 2000: 1쪽 (원본에는 쪽수 표기 없음)
아이들의 창안적 철자에도 같은 예가 있습니다. 유리창 안쪽에서 본 모양만 있는 게 아니라 좌우가 반전된 모양, 글자가 넘어진(?) 모양,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양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안적 철자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떨까요?
곰을 만나면 곰을 뒤집어 문을 열고 달아나면 되고, 우유가 넘어지면 ‘아야’가 되는 거 아시죠! 그 점에 착안해서 글자를 거꾸로 만들어보는 놀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꾸로 읽어도 읽을 수 있는 글자에 착안하여 시를 쓴 시인도있습니다. ‘글자동물원’을 쓴 이안 님입니다. 아! ‘글자동물원’이 아니라 ‘른자동롬원(이안, 2015:12쪽)’입니다. 이 시는 초등학교 1-1 (나)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국어 1-1 (나) (교육부) 6단원(172쪽)
거꾸로 읽어도 읽을 수 있는 낱글자를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① 초성과 종성은 모두 ‘ㄱ’, ‘ㄹ’, ‘ㅍ’, ‘ㅇ’, ‘ㅁ’이어야 합니다. 다른 자음은 안 됩니다. ㄱ은 거꾸로 읽으면 ㄴ이 되지만, 나머지 4개 자음은 원래 음가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② 중성은 ‘ㅗ’, ‘ㅜ’, ‘ㅛ’, ‘ㅠ’, ‘ㅡ’만 사용 가능합니다. 거꾸로 읽었을 때 음가가 같은 경우는 ‘ㅡ’밖에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국가는 ‘논가’, 곡예는 ‘눈예’, 곡식은 ‘눈식’, 남극은 ‘남는’으로 바뀝니다.
만약 인쇄해서 활용한다면 글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고딕과 같은 글자체는 직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꾸로 보아도 원래의 글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외 글자체는 각종 돌기와 맺음 때문에 거꾸로 보면 어딘가 어색해 보입니다.
아래 그림은 같은 ‘곡’ 자인데 글자체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보여줍니다. 오른쪽 글자는 왠지 어색하지 않나요?
거꾸로 읽어도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예 1
다음은 ‘곡예’와 ‘곡식’의 예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예 2
거꾸로 읽어도 읽을 수 있는 단어를 모아 '거꾸로 글자 카드'라는 이름으로 업로드해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딕체를 사용할까 했는데, 나중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돌기와 맺음이 있어서 뒤집어 놓으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글자체를 (일부러) 사용했습니다. 시각적 변별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고딕체로 바꿔서 사용하면 됩니다.)
훈련에 의해 시각적 변별력을 기르는 것에 대해선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 정도의 글자를 스스로 읽을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큰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부(2017). 초등학교 국어 1–1 (나). 서울: 미래엔
이안(2015). 글자동물원, 파주: 문학동네.
Ende, M.(2000). 끝없는 이야기. (허수경 역). 서울: 비룡소
<< 토요일부터 해외출장을 갑니다. 매일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으나, 월-금, 하루 8시간씩 강의해야 하는 일정인지라, 출장기간 동안에는 아무래도 계속 쓸 자신이 없군요. 12월 26일 이후부터 계속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