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내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내 Sep 29. 2020

너에게 이런 기쁨을 줄 수 없다면

미리 사서 걱정해 보는 가족계획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골몰하곤 합니다. 가끔은, '걱정하기'가 가만히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꽤 괜찮은 취미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왜 걱정에 '산다'는 표현을 붙였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미리 걱정해서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돈 내고 사서 미리 생각해 볼만 하다, 싶을 만큼 재미있거든요.


요새 가장 많이 하는 재미있는 걱정은 '가족계획'입니다. 아직 뱃속에도 있지 않은 첫째 아이를 낳고 나서 둘째를 낳아 동생을 만들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걱정이죠. 첫 아이가 언제 생길지, 아니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데 미리부터 둘째 생각을 하는 이유는 아마 제가 동생들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첫째이기 때문일 겁니다. 금전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하나만 낳아 잘 키우기도 어려운 세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아이를 하나만 낳게 되면 인생에 이토록 중요한 관계를 나 하나 (혹은 나 하나와 남편이) 편하자고 만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죄악을 저지르는 것 같거든요.


동생들과는 평생 사이가 좋았습니다. 저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 네 살 터울의 남동생, 우리 세 사람의 기억에는 서로 다툰 기억이 아예 없습니다. 늘 저 편할 대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사람이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동생들에게도 확인했는데 진짜였어요. 동생들은 '싸울 일이 없었던 거 같은데?' 하며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기억에도 그렇습니다. 살면서 동생들하고 다툴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컴퓨터도 돌아가면서 차례차례 했고, 보고 싶은 TV 채널은 항상 같았습니다. 서로 옷을 훔쳐 입지도 않았고, 용돈을 가지고 싸운 적도 없었어요.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담요와 귤을 끼고 앉아 훌라를 쳤고, 좀 더 자라서는 거실에 TV를 없애고 공부 책상을 두고 다 같이 모여서 공부를 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요? 대화 코드도 비슷해 항상 재밌었어요. 대학생 때는 처음 번 과외비로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셋이서 커플 모자를 맞췄던 기억도 납니다. 모두 성인이 되고 난 뒤엔 해외여행도 같이 다니고, 밤새 수다도 떨었죠. 잠시라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기억을 더 섬세하게 뒤적여 볼수록 행복했던 일만 떠오르네요.


인터넷을 하다 보면 'K-장녀'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주로 '고통받는'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쓰여 있죠. K-장녀들은 맏이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내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어요. 갱년기가 처음인 엄마를 사춘기가 처음인 나로 상대하느라 동생들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참 못 됐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모범을 보여야지 하는 말 때문에 하고픈 것 대신 어른들이 보시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르며 자랐습니다. 큰 언니, 큰 누나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양보했고,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컴퓨터 할 순서를 양보했고, 조금 자라서는 등교 시간이 겹쳤을 때 화장실 사용을 양보했습니다. 셋이서 같이 등교를 하느라, 첫 번째로 씻어야 했던 저는 강제로 엄청나게 일찍 기상을 했어요. 학원을 땡땡이치고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보러 다녔던 동생들과는 달리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열심히 공부도 했습니다. 동생들의 걱정으로 이미 가득 찬 부모님의 마음에 제 걱정까지 얹어드리고 싶진 않았거든요. 어른이 되어서도, 멀쩡히 입사한 대기업을 3,4개월 다니고 퇴사해버린 두 동생들과는 달리 저는 만 6년이 가깝도록 첫 번째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고 있습니다. 잘 길러진 책임감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인가, 하면서요.


그럼, K-장녀인 저 혼자만 노력하고 애썼기에 남매의 우애가 깊을 수 있었던 걸까요? 아뇨. 전 동생들에게 받은 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몇 년 동안 동생들은 옆에서 저의 회복을 묵묵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단 한 번도 본인들을 생각해 달라, 본인들 입장을 이해하고 위해 달라 이야기 한 적 없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유해 보이는 모습에 비해 급하고 모난 성격도 동생들은 늘 품어 주고 다독여 주었습니다.  운동하고 걷고 땀을 내는 것을 죽는 것만큼 싫어하는 여동생은 저를 위해 여행 내내 하루 2만 보 이상을 함께 걸어주었고, 어머니와 다투고 동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 저를 남동생이 꼭 안아주었죠. 혼자서 고생하지 말고 짐은 좀 나누어 지자는 말과 함께요. 약 30년 간 쌓은 남매의 기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마 삼 남매 모두 배려심이 깊고 욕심이 많지 않은 성격이라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합니다. 혹은 셋이서 부대끼며 자라느라 자연히 배려하고 욕심을 갖지 않는 성격으로 자라났는지도요.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고민이 되는군요. 동생들이 없는 첫째의 삶. 생각만 해도 너무 외롭고 슬플 것 같아요. 누구 영화를 보고, 누구 여행을 가야 하나요? 장 내밀한 슬픔과 우울은 누구를 통해 치유받을 수 있나요? 세상은 개인을 더 개인화시키고, 외로움을 잘 견디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성긴 밀도로 변해 가는데 그 가운데 누구를 의지하고 영원한 내 편이라 믿을 수 있을까요? 부모님이나 배우자, 친구가 각자의 위치에서 해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모두 담아내는 형제, 자매라는 그릇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분명히 둘 이상의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끼칠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때는 '낳아만 놓으면 알아서 잘 크더라'하는 시절이었죠. 지금의 분위기는 꽤 다른 듯합니다. 육아를 하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일단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이들이 웬만큼 자라기 전까지는 둘 이상의 아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부모님이나 주변의 도움을 받아도 마찬가지라고요. 게다가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것만 해주도 모자란데 두 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속상할 것 같아요. 너무나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고 있고,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너무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밀려올 미안함과 안타까움은 부모로서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은 못 키워, 하는 친구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렇기에 저도 고민하는 것이고요.


누군가 속 시원하게, 하나만 낳아! 혹은 둘을 키워! 하고 정해주면 좋을 텐데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으니 저는 오늘도 삼 남매로 자란 기억을 더듬고, 현실적인 충고를 마음에 새기며 걱정 놀이를 시작합니다. 아직 저를 만나러 오는 길일 첫째에게, 언젠가 "동생이 있으면 어떨 것 같아?" 하는 질문을 던질 날을 고대하면서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